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 #스승의 날(15일)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전국중등교사노동조합은 14일 교육부 장관에게 스승의 날을 법정기념일에서 제외하고 민간 기념일로 전환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기사다. 대신 '교사의 날'을 제정해 달라고 제안한 것인데, 2016년 9월 28일 시행된 일명 ‘김영란법’ 때문이란다.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도 안되고, 음료수 한 캔도 허락되지 않으니 선생님께 대한 감사는 마음속으로 간직하라는 법이다 보니, 언제 어떻게 말썽이 불거질지도 모른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얘기다. 그럴 바에야 아예 스승의 날을 없애달라는 청원인데 딱한 노릇이다. ‘스승의 날’ 대신 ‘교사의 날’을 만들어 달라는 말은 또 뭔가.

최충웅 경남대 석좌교수는 그의 칼럼에서 ‘스승의 날’과 ‘교사의 날’은 개념과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교사의 날’은 각급 학교 현직 교사들의 날로서 소속교사들의 행사적 의미가 강하지만, ‘스승의 날’은 학교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나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뤄지는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덕목이 훨씬 폭넓게 작용하는 다차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 없다”고 하는 말이 명언으로 변질된 교육현장의 모습에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아예 실체도 없는 그림자 언어가 돼버렸다.



#익숙하되 낯선 단어, ‘스승’과 결을 같이 하는 말 중에 ‘멘토’가 있다.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가끔 ‘멘토’란 말이 맘에 걸린다. 이 나이 먹도록 누구에게 ‘멘토’가 된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일종의 책임감 때문이다. 주제에 무슨 ‘멘토’ 운운이냐고 비웃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뜻은 아니다. ‘멘토’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게 아니라 적지 않은 세월을 어떤 식으로든 주위에 영향을 미치고 살아왔기에 그걸 돌아보기가 부끄럽다는 자각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라도 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딴은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 ‘멘토’와 ‘멘티’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며 발전해가는 사회는 턱없는 희망 사항일지도 모른다. 여야 정치인들이 경쟁적으로 펼치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귀라도 씻어야 할 것 같은 ‘막말 퍼레이드’를 보면, ‘멘토’ 없는 사회가 얼마나 볼썽사납게 변해가는가를 극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본받을 만한 사회지도자를 가지지 못한 국민은 불행하다.

그러나 지도자의 ‘리더십(leadership)’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팔로워십(followership)이다.

멘토의 리더십은 궁극적으로 멘티의 팔로워십으로 완성된다.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테레마쿠스를 교육시킨 ‘멘토링’의 요점도 알고보면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상호작용’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사색하고, 상상력을 최대한 촉발하여 토론으로 이끌고, 잘 묻고 잘 들어주고, 권위의식 대신에 동료나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한다는 것이 ‘멘토링’의 골자다.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력을 가질 수 있도록 철학, 논리학, 수학에 중점을 두고 지도했다는 점만 빼면 그 당시 멘토가 테레마쿠스를 상대로

‘멘토링’한 내용도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충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역할이다.

위대한 지도자가 한 시대, 한 민족을 이끌고 가는 모습도 감동적이지만, 위기의 시기에 작은 변화들이 모여 올바른 방향을 잡아갈 때 더 큰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얼마 전 한 여성백일장에서 87세의 참가자를 만났다. 본지에도 소개가 됐지만 아흔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백일장에 나와 자웅을 겨룬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며 우리의 ‘멘토’로서 충분하다.

주위를 돌아보자.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수많은 인연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보자.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이 스승이고 멘토다.

‘멘토 부재의 시대’라는 자조 섞인 넋두리 대신 스스로 훌륭한 멘토, 멘티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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