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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동대지진은 배외주의 육체화 교육의 실험학교였다
8. 관동대지진은 배외주의 육체화 교육의 실험학교였다
  • 박장미
  • 승인 2019.06.16 1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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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발생 후 퍼진 유언비어로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 배양
일본제국주의, 국제연대 민족 우호정신 악화시키는 경향 생겨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시신들 <독립기념관>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 시신들 <독립기념관>

 

 ■대국주의의 교육 : 일본 아동을 식민주의자로 육성시키다.

●조선멸시감의 정착

다음 회고담은 그간의 내막을 잘 보여주는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현재 조선에 대한 애착을 품고, 조선사 연구에 종사한 2명의 일본인 학자는 조선에서 보낸 소년 시절에 대해서 이렇게 확인하고 있다(<조선연구>30호).



하타다(旗田): 나는 그 쪽에서 자랐지만, 조선의 아이들과 존 기억은 없었다. 지금도 조선 아이들의 얼굴은 떠오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풍물로 인하여 떠오르는 것이었지요. 복장이라던가, 습관이라던가 그런 것이었지요. 조선인과 직접 접촉한 것은 없었어요. 아이였을 때이니까요. 와타나베(渡部)선생은 어떠했습니까?



와타나베(渡部): 저도 동감이지요.



일본의 아동은 일본인화돼 자신들과 동류가 된 조선 아이들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더 나아가서 조선 아이들의 세계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조선 아이들은 ‘자연의 풍물’이던가, 혹은 함께 놀 필요가 없는 ‘아류 일본인’으로 간주된 것은 당연했다. 이것은 일본인 어른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조선 아동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본인들이 조선 아동에 대해 글을 쓴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는 조선인을 독자적인 가치를 갖지 않는 ‘아류 일본인’으로 간주하는 데서 나오는 당연한 결론이다. 거기에는 이러한 원인이 있었다.

즉, 지배자의 조선 인식을 필연적으로 나타난 조선인 멸시에 의한 것이다. 다이쇼(大正)시기의 짧은 풍자시 냇가의 버들(川柳) 중에는 “개와 총각(선동: 총각은 원래 미혼 남성을 뜻하는 조선어이지만, 당시에는 조선인의 비칭으로 사용)은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라”, “총각(鮮童)이라고 부르면, 총각이 무엇입니까라고 한다.”, “손을 쳐들기만 하면 총각(鮮童)은 벌써 우는 소리”를 낸다(<조선천유>, 1922년).

이 시는 일본의 정부만이 아니고, 일본 국민들도 지배자로서 조선에 들어가고, 조선인을 비하해 온 사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배자로서의 일본 국민들은 처음에는 ‘망국의 백성’으로서 조선인을 냉시하고, 드디어 일본과 조선의 깊은 역사적 관계를 왜곡한 것에 의해 (예를 들면 ‘일선동조론’), 조선인을 ‘아류 일본인(亞日本人)’으로 보는 견해(本家ㅡ 分家論)를 역에 덧붙였다. 조선인에게 민족적, 인간적으로 독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인데 일본인은 조선인과 그 아동들의 내적 세계에 들어가는 동기를 내재적으로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조선인 아동이 외국인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조선인을 두려워하는 천성이 멸시감으로 밑바닥 깊이 숨겨지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타민족 지배자에게 있어서 불가피한 현상이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널리 확산 되고, 양성됐는데 조선에서는 3․1운동,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일본 아동과 조선인과의 지식 위에서만이 아닌, 생활 실태 속에서 최초의 만남은 관동대지진(1923년)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동경에서 그 불행한 만남의 일단은 당시 학동 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곡고등소학교의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남녀 학생이 ‘가장 두려웠던 일’이라고 느꼈던 사항은 다음과 같다(동경시청, 만조보사공편, <11시 58분>, 1923년).

[피해 남자]

조선인 109명

방화 51명

지진 49명

회오리바람 19명



[피해 여자]

조선인 소요 140명

방화 68명

회오리바람 35명

도로의 혼잡 17명



자연 재해를 두려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조선인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째서였을까? 심상소학생도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학동 의견조사의 결과를 개괄한 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두렵다. 공포스럽다. 밉다’의 항목 중에서 가장 많은 항목은 조선인과 해일에 대해서 가지는 느낌이다. 폭탄을 던져서 두렵고, 우물에 독을 넣어서 난처하였다는 식으로 일반적으로 당시의 유언비어를 믿고 극단적으로 위협을 받은 듯하다. 조선인에 대한 불안에서 혹은 진지한 반감에서, 이것이 추가 체포에도 다분히 종사했던 군대 청년단의 활동을 용기 있게 느낀 자도 다수 있었다. 심지어는 조선인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또는 그 시체를 보고 통쾌해 했다. 나도 어른이었다면, 많은 조선인을 죽였을 것이라는 식으로까지 너무나 강하게 그들을 증오하고 적대시하였던가를 엿볼 수 있다.”

소학교 교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그 밖의 기록도 아이들의 목소리로써 “화재도 두려웠지만, 조선인도 두려웠다는 것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增子菊善, 酒井源藏 <술동이를 책상삼아>,1923년).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교사는 ‘유언비어’의 위험성을 깨닫고, 그기에 혼미 되지 않은 교육의 필요를 제기하고 있다. 즉, 두 사람의 교사는 석유가 벤 수건을 가지고 방화하였다는 이유로 조선인을 체포해 보면 그것은 땀이 밴 수건이었다던가, 폭탄 소지 협의로 구인해 보면, 원가 건위고장환을 달이는 약탕관이었다던가 하는 예를 제시하면서, ‘폭탄을 투하한 조선인을 본 아동이 죽였다던가 우물에 독약을 던진 현행범을 목격했을까? 극히 애매한 유언비어였을까? 이 유언비어를 선전하는 과연 누구일까?, 설령 한 둘의 불경스런 자가 있었다고 해도 그 정도로 대소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의문을 던진다. 그것이 일본인의 아이들에게 초래된 것은 ‘우리 집을 태우고 아버지를 죽이고, 형제자매에게 상처를 준 것은 그 조선인이었던가? 그 미운 자는 조선인이다. 지금 보아라고 하는 식의 적개심이 배양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인의 ‘혈안이 되어 변명도 듣지 않고, 폭행을 드러낸 것은 國史에서 분수가 없는 한스러운 일이다.’라고 단정하고, ‘금후의 교육에 있어서 이런 그릇된 狹量을 없애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한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제언이 교육계에서 그 후 살아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유언비어’가 계속 유포되고, ‘두려운 것, 미운 것, 죽여도 좋은 것’라는 형태의 조선인관이 많은 일본인 아이들의 뇌리에 정착해 갔다.

관동대지진은 일본 민중과 그 자제에게 배외주의의 육체화 교육의 실험학교였다. 이와 같은 ‘타민족을 미워하는 것’의 감성을 토대로 하여 다시금 인종주의 이데오로기의 주입이 전개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지배는 조선의 아이들에게 노예의식을 길들이게 하고 일본의 아이들에게 지배자의 눈을 갖도록 하고, 이웃에 사는 양 민족의 아동들이 서로 이질적으로 섞어진 생활 의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와 같은 부담의 유산은 1945년에 이르기까지 계속 쌓여져 일본이 패전하고서도, 특히 일본에 관해서는 단절된 대중적인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확실히 일본인이 조선인과의 관계에서 지배자의 눈을 가지고 있는 한 조선 아동을 알려고 하는 의욕은 솟아나지 않는다. 역으로 조선 아동을 알려고 하면, 그 시험 과정은 필연적으로 일본국민에 부착한 지배자의 눈을 극복하는 길로 연결될 것이다.

관동대지진을 다룬 당시 일본 신문 <KBS 역사저널 그날 캡쳐>
관동대지진을 다룬 당시 일본 신문

 


●억압 민족의 사상과 감성

이상과 같은 대국주의 교육을 밀어붙여서 일본 아동들은 일본제국주의란 사상의 독소를 체내에 깊이 빨아들여서 억압민족의 사상과 감성을 몸에 베이도록 했다. 이를 분석 정리해 보면, 다음 4가지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견해가 비뚤어졌다고 하는 문제이다. 전전의 교과서에는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가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게다가 경우에 맞는 사실만 모아 유연성 있게 가르쳐 왔다. 즉 역사가 위조되고, 그 위조된 역사를 바른 역사라고 생각하도록 교육시켜 왔던 것이다. 그런 역사는 당연히 그 용어로서 지배계급의 말을 일본 국민의 말로 확대하였다. 예컨대, <朝鮮征伐>이란 말이 있다. 거기에는 도요토미히테요시(豊臣秀吉)의 출병에 대하여 조선인민은 의용군을 만들어 저항한 것이라던가, 그때 일본이 가져온 조선의 문화재․기술자가 일본문화의 일부를 만들고 있었다던가 하는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나쁜 자를 퇴치한다는 ‘정벌’ 중심의 의식으로 역사를 가르쳐 온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위조를 통하여 전전 일본의 청소년들은 그 세계에 대한 견해의 기초를 형성해 나갔기 때문에 그러한 기만 상태에 놓인 것에 대하여 자기비판을 할 힘이 너무나 약화됐다. 세계에 대한 견해가 지배자의 형편에 맞도록 유연스럽게 되어간 셈이다.

둘째, 세계를 보는 시야가 극히 좁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일본 국민이 아시아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의 방법일까 지식을 가지는 양상에도 깊이 반영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전전의 경우에는 아시아 여러 민족의 문화, 역사에 대하여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학습하고, 그것과 교류한다는 관계는 거의 단절돼 왔다. 일본인의 눈은 항상 구미를 향해 있으며, 아시아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신구탈아’라는 입장에서 세계 문제를 보고 아시아 문제를 과감히 방치해 왔던 것은 아닐까?

셋째, 그러한 아시아를 버리고 세계의 중심은 유럽뿐이라고 하는 견해에서 볼 때는 당연히 민족차별 사상, 특히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한 차별 사상이 형성되어 온 것이다. 즉, 민족 차별의식의 정착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시아와의 우호·연대사상의 상실인 것이다. 이런 것이 중첩되고 있었고, 넷째로 스스로 해방을 크게 늦추게 된 원인을 만들었다. 전전의 일본제국주의 시대는 국내의 일본 인민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하여 지배하였다는 역사였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를 쓰러뜨리기 위하여서는 국내에서 인민 해방 운동과 일본에 지배되고 있던 여러 민족의 민족 해방 투쟁과의 두 가지를 서로 제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필요성에 일본 국민은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어려움은 일본 천황제의 지배가 엄했다고 하는 것에도 있지만, 국민 문제로 받아들여 생각하면 국민간의 민족 차별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노동ㅈ 사이에도 민족 차별 임금이라는 것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와 단결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 차별 의식은 계급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가 유연성 있게 역할을 다한 것이다.



이리하여 아시아 여러 민족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떠나 제국주의 사상과 감성을 초래하는 것에 따라 일본 아동들 사이에는 인민의 근본적 이익의 입장에서 서는 것을 보고 생각해 가는 방법을 상실하고, 국제연대와 민족 우호 정신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생겼다. 즉, ‘타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에게는 자유가 없다.’(마르크스)라고 하는 법칙적 진실이 대국주의 교육을 통하여 일본 아동들 사이에 관철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후,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에 의한(자국 인민에 대한) 교육의 왜곡과 제국주의에 의한(타민족에 대한) 자주적인 교육의 부정으로 인민이 받아 온 불행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은 아닐까라는 것 같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 말은 일찍이 억압민족의 인민이 하는 말로는 부정확․불충실할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교육의 왜곡과 부정의 질적 차이를 되씹어 보면서 억압 민족의 교육이란 어떠한 것일까를 자성해야만 한다.
 

관동대지진 학살 목격자의 증언 <KBS 역사저널 그날 캡쳐>
관동대지진 학살 목격자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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