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갑(철학박사,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그리운 고국, 디아스포라

기원전 597년, 이미 예루살렘을 함락한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유대인들을 바빌론에 끌고 갔다. 이후 유대인들은 70여 년 동안 바빌론에 억류된 채 강제 노역에 종사하여야만 하였다. 이를 ‘바빌론 유수(幽囚)’라고 부른다. 성경의 시편 137장은 당시를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는 바빌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그리며 울었도다.”

먼 타국에 노예로 끌려왔던 유대인들이 눈물 속에 고국을 회상하며 지은 노래가 이 시편이다. 보니 엠(Boney M)의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는 이 시편을 텍스트로 만든 노래이다.

‘바빌론 유수’는 곧 디아스포라(Diaspora)의 개시를 알리는 말이다. 디아스포라는 본래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그들 고유의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며 사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날에는 타국에 살면서도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며 사는 모든 민족에게 통용하고 있다. 일본의 재일교포,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고려인들은 모두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인 것이다.

하지만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그 사전적 의미보다는 고향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하는 민족의 비극을 먼저 떠오르게 한다.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을 때 느껴지는 짙은 슬픔, 비애 같은 것이다.

"천 년을 산 만 년을 산 / 낙동강! 낙동강! / 하늘가에 간들 / 꿈에나 잊힐소냐 /잊힐소냐 –아-하-야"

조명희 선생의 ‘낙동강’에 나오는 노래의 끝부분이다. 어느 해 봄날 한 떼의 무리들이 멀리 낯선 땅 서북간도로 이주할 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낙동강을 건너며 한 청년이 부르던 노래이다. 노랫가락은 어느새 배를 탄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 들며 흐느낌을 전염시켰다.

디아스포라에는 으레 강이 등장한다. 바빌론 강가, 요르단 강, 그리고 낙동강. 김동환 시인의 ‘송화강 뱃노래’에도 “돌아다보면은 고국이 천 리런가 /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 온 길이 천 리나 / 갈 길은 만리다”라며 나라를 잃고 낯선 땅을 헤매는 민족의 먼 여정을 노래하고 있다.

천년만년 흐르고 흐르는 강이야말로, 유구한 삶의 역사를 가장 잘 나타내기 때문일까? 어쩌면 강을 건너는 이미지만큼이나 오래 뿌리 내린 터전을 떠나 낯선 곳을 떠도는 고난의 행로를 잘 드러내는 것도 없을 듯싶다. 낙동강을 건너 멀리 서북간도 하얼빈까지 왔던 조선인들이, 송화강변에 앉아 고향을 그리며 다시 눈물을 떨구었을 것만 같다. 그때의 눈물은 간데없지만 송화강은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흐르고 있는데 말이다.



나라 잃은 지식인, 조명희

포석(抱石) 조명희(1894~1938)는 17세에 나라 잃은 백성이 된다. 하기야 12세 때인 1905년 사실상 독립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을사늑약이 맺어졌으니, 선생은 한창 이상에 불타야할 10대를 쓰러지는 나라에서 보낸 것이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에 유학을 다녀왔지만, 나라 잃은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터. 꽃피는 봄이 왔어도 “이 가슴은 봄을 안고 갈 곳 몰라” 헤매야만 하였다.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할 것인가. 초인을 목 놓아 부른들 가혹한 현실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에는 절대적인 권능을 지닌 의지처가 있다. 유일 절대신, 야훼가 그다. 하지만 조명희의 가슴에는 그런 의지처도 없었다.



"영겁의 때가 있고 / 무한의 우주가 있어 // 억만 번 생이 있다 하더라도 / 지금 나는 이곳에 서서 / 맑은 바람 팔 벌려 맞으며 / 핀 꽃송이 떨며 입 맞추고 있다 // 時와 處와 생의 포옹 / 아아 그 舞蹈 / 인연의 結珠" (인연)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우주, 그 안에서 억만 번 생멸하는 생의 윤회. 어쩌다 인연이 되어 잠시 나왔다가 사라져 갈뿐, 신의 권능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의지할 곳은 오로지 자신뿐인데, “윤생(輪生)의 인연(조명희, '分裂의 苦', <조명희 시선>, 지식을 만드는 지식)”을 따라 나온 조선은 역사상 가장 가혹했던 시기였다. 고려 말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때에도 지식인들은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오히려 원나라를 배경으로 더 큰 뜻을 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제 치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지극히 적었다. 현실은 너무도 처절했다. 친일 부역자가 되지 않는 한, 디아스포라는 이들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그렇게 “인연의 마디(조명희, '分裂의 苦', <조명희 시선>, 지식을 만드는 지식)”를 엮어 나갔다.

조명희 선생은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혹은 무정부주의 등의 사상적 틀로 재단하기에는 그 세계가 훨씬 더 크다. 선생의 행위, 예컨대 북간도로의 이주, 소련으로의 망명, 그리고 선생의 글이 지향하는 바는 특정 국가와 민족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의 시선이 머문 곳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 압박 속에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같은 동포로서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었기에 그 연민이 더 강하고 직접적일 뿐,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 선생의 이상이었다.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선생은 기꺼이 망명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선생이 꿈꾸던 프롤레타리아 해방구가 아니었다. 소련은 어느새 독재자 스탈린에 의한 동토의 왕국이 되어 있었다. 독재 권력에게 선생은 위험한 디아스포라의 지도자로 읽혔던 것으로 여겨진다. 총성과 함께 선생의 비극적 생도 종말을 고하지만...... 하나의 끝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 선생이 뿌린 피는 결코 작지 않았다.



조선족 고려인, 그리고 한국인

유대민족의 디아스포라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더불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렇듯 조선인의 비극적 디아스포라도 조선의 해방과 함께 마침표를 찍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 해방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지만, 조선인의 비극은 끝나지 않고 있다. 해방된 조국엔 여전히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횡행하며, 만주벌판에서, 시베리아 언 땅에서 고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우국지사, 독립운동가의 귀환을 막고 있다. 이런 일이 5천만 국민이 1인당 소득 3만 불을 넘긴 경제대국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과거청산은 소리만 높을 뿐, 오히려 친일부역자와 그 후손들의 노골적인 반발에 부딪히곤 한다.

하얼빈에 거주하는 조선족 중학생들이 고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위해 아리랑을 공연해 주었다. 고마움과 감격스러움도 잠시,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도 내일이 불확실한 그들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과거엔 가진 게 없어서 중국의 조선족이나 러시아의 고려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지금 경제대국이 되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국시대 월(越)나라 사람 장석(莊舃)이 초(楚)나라에서 집규(執珪)라는 높은 지위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병에 들자 월나라 소리로 신음하고 있더라는 이야기가 <사기> ‘장의열전’에 전한다. 이때부터 월음(越吟), 즉 월나라 소리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도 타국에선 고국이 그리운 법인데, 하물며 어쩔 수 없이 타국을 떠돌며 온갖 수모와 고난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고국을 향한 그리움은 얼마나 크고 깊을까. 어쩌면 그 깊은 그리움이 상처로 남아 그들은 고국의 말을, 고향의 소리를 애써 기억하려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상상해본다. 진천군내의 학교와 중국의 조선족 학교가 결연을 맺어 방학 때라도 학생들을 교환하여 같이 지내게 하면 참 좋겠다고. 진천군 차원에서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등지에 흩어져 있는 고려인들도 자주 부르고, 한국어 선생을 파견하여 방탄소년단의 노래와 춤을 가르쳐준다면 무척 신나는 일일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그러면 조명희 선생도 저승에서 참 좋아하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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