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핀 국문학사의 정수精髓… 송강松江을 추념하다

 
 
정송강사.
정송강사.

(동양일보) 어제는 다람쥐가 꼬리를 쳐들며 길을 열어 주더니 오늘은 뻐꾸기 소쩍새가 마중 나왔다. 몸과 마음 천근만근이고 쓰라린 상처는 아물지 않았는데 비 개인 날 아침의 산길은 소리의 숲, 맑은 기운이 가득했다. 짙은 안개 새새틈틈 새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니 산초향이 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비에 젖은 참나무 소나무는 나그네 가는 길에 도열해 푸른 물감을 뿌리고 있다. 난생처음 명자나무를 봤다.

쑥부쟁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불모의 땅을 비집고 일어서더니 기어코 꽃대를 들어 올리는 너, 나의 삶이 쑥부쟁이만도 못하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요란하지도 불미스럽지도 않다. 매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새벽 산길에서 이런 저런 것들을 하나씩 부려놓으니 하산하는 길이 한결 가볍다. 온새미로, 자연은 언제나 정직했다. 마음에 여백이 생기고 삶의 이유가 되었다.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환희산 기슭의 송강사를 둘러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한 사람의 삶이 이토록 파란만장할 수 있는가. 유복한 어린 시절도 잠시, 유배생활과 시련이 잇따랐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얻었다. 다시 사화에 휘말려 낙향하는 등 굴곡진 삶의 연속이었다. 주옥같은 글과는 달리 그의 정치적 삶은 치열했고 가혹했다. 조선시대 천재 시인 송강 정철의 삶이 그렇다.

그는 1536년(중종31년) 음력 12월 6일 영일 정 씨 유침(惟沈)과 죽산 안씨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큰 누이는 인종의 후궁이 됐고, 막내 누이는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손자인 계림군에게 출가했다. 이 때문에 이린 시절에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경원대군(훗날 명종)과는 함께는 놀며 지낼 정도로 두터운 관계였다. 훗날 명종은 송강이 과거에 급제하자 잔치에 술과 안주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유복한 어린 시절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나이 10살 때, 1545년 을사사화로 왕실 외척간에 정국 주도권 싸움이 시작되면서 매형인 계림군이 역모 주동자로 몰리면서 정철의 부친과 당시 이조정랑이던 맡형이 잡혀갔다. 계림군은 처형됐고 아버지는 함경도로, 맏형은 전라도로 유배됐다. 2년 후엔 아버지가 경상도로 유배됐고, 큰형은 함경도로 유배되던 중 사망했다.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로, 경상도로 유배지를 전전했다.

인생에는 반전의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1551년 왕자(선조) 탄생에 따른 은사(恩赦·특별사면)로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났다. 아버지는 선친의 묘소가 있는 담양 창평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곳에서 문인 송순에게 가사를,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에게 정치와 행정을, 임억령에게는 한시를, 김성원에게는 거문고를 배우는 등 각 분야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에게 배우며 꿈을 연마했다.

그는 담양 생활 10년 만인 27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성균관 전적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요직을 지냈다. 그의 출세가도에는 어릴 적 함께 뛰어놀던 명종이 재위했던 것이 한 몫 했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화려함도 잠시였다. 40세와 43세에 당쟁에 휘말려 낙향했다.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를 시작으로 예조판서까지 승진했지만 49세에 동인의 탄핵으로 낙향해 4년간 담양에 머물렀다.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작품이 관동별곡(關東別曲). 이 작품은 강원도의 명승지를 돌아본 뒤 읊은 노래인데 조선 가사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낙산사,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등 작품속의 풍광은 지금도 동해안의 명소로 인기다.

그는 54세에 다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됐지만 56세에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사서 유배됐다. 58세에는 동인의 모함으로 강화도로 유배돼 칩거 중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정치적으로는 강직하지만 냉혹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1589년 정여립 역모 사건의 수사 책임자로 있을 때는 조금이라도 연루되면 처형하는 동인 탄압의 주역이었다. 이 때 옥사한 사람이 1천 명에 달했다.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편협하고 행동이 경망한 사람으로 기록돼 있지만 선조수정실록에는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강직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정철이 묻힌 곳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이다. 마을 뒤편 소나무가 무성한 곳에 무덤 4기가 있는데 한쪽에는 부모가 묻혀있고, 다른 한쪽에는 큰 형 내외가 묻혀있다. 그는 이곳에서 부친상 시묘살이 2년, 모친상 시묘살이 2년을 했다. 마을 뒤편 언덕에는 정철이 좋아했던 남원의 기생 자미(紫微)의 묘가 있다. 자미는 정철이 1591년 평안도 강계에 유배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철이 전라도와 충청도 도체찰사로 임명되면서 길이 엇갈렸다. 강이는 엇갈린 사랑에 눈물을 흘리며 승려가 되었고, 정철이 죽자 묘소를 지키며 여생을 보냈다.

정철의 묘가 문백면 봉죽리로 옮긴 것은 1665년(현종 4년) 우암 송시열의 권유 때문이다. 이곳에는 송강의 영정을 봉안한 송강사와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 송강의 작품과 유물 등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숲과 계곡이 깊고 느리다.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도 그지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는고야…. 그의 노래처럼 생과 사를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그렇지만 상처깊은 풍경이 있었기 때문에 불멸의 문학이 탄생한 것이다. 가사문학의 전설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과 시조 ‘훈민가’ 등 한국문학의 백미는 그냥 탄생하지 않았다. 하여 이곳이 정철의 문학정신이 깃든 곳이면 좋겠다. 시심으로 가득한 인문학의 숲, 치유와 해탈과 새로운 돋음이 가능한 희망의 숲이면 더욱 좋겠다.
 

송강 정철의 신도비.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송강 정철의 신도비.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우리동네 숨겨진 이야기'는 50회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지역문화의 시대, 문화콘텐츠의 시대를 맞아 충북 곳곳의 문화원형과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하고자 했습니다. 충북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되고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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