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논설위원 / 청주대명예교수

[동양일보]현대국가는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복지국가를 정체성으로 삼는다. 복지(welfare)는 사전적 의미로는 ‘만족할 만한 생활환경’을 뜻하고 학문적 의미로는 ‘안녕, 건강, 행복, 번영, 소통, 질서, 안전, 형평, 정의, 적정배분, 기회평등 등의 조건이 충족된 상태를 말한다. 이렇듯 복지는 다의적, 포괄적 개념을 특징으로 한다. 복지는 국가가 국민들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모든 계층이 해당된다. 그러면서도 극빈자, 노약자, 노숙자, 장애자, 소외자, 탈북자 등이 우선적 대상이 된다. 이들은 혼자의 힘으로는 기초적인 생활마저도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나 사회의 제도적 인도적 지원이 절실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7월 31일, 서울 관악구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탈북민 한모(42)씨와 여섯 살 아들이 숨진 지 두 달이 지나 뒤늦게 발견되었다. 추정사인이 아사(餓死:굶어 죽음)이었단다. 굶주린 상태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탈북민들이었다. 두 달이 지날 때까지 아사한 것조차 모르는 상태였다니 충격이다. 이 보도를 접한 국민들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사회안전보장망이 잠자고 있었다는 데에 허탈해 하고 있다. 말로만 복지국가이지 실제로는 무정부상태인 것이다.

사회안전보장망이 아무리 엉성하고 그 운영체계가 부실하다 하더라도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라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국민기초생활보장, 긴급복지지원, 한부모가족지원 등의 제도가 마련되어 있으면 무엇 하는가. 유명무실한 것이 아닌가. 제대로 작동이 되었으면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한씨는 정착 초기 5년간 지자체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되었다가 아르바이트로 소득이 생기자 수급자 자격이 중단되었다. 남편과는 이혼한 상태인데다 생활이 어려워 주민센터 복지팀을 찾아가 기초생활수급신청을 하였더니 공무원들은 “남편과의 이혼 확인서를 받아오라”며 냉대하였단다. 한씨는 이혼한 남편이 중국에 살고 있어 주민센터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사선을 넘어 탈북한 입장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아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프다. 통장에 남아 있던 3800여원도 찾아갔고 냉장고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중앙·지방정부가 건재하다 한들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회안전보장망도 이름뿐이었고 정부는 마땅히 해야 할 조치를 취하지 않는 부작위(不作爲)를 행하고 있었잖는가. 말로는 국민의 심부름꾼으로 주인인 국민을 하늘처럼 섬기겠다면서 실제로는 상전, 시혜자 및 갑질 노릇을 한 것이 아닌가. 주민센터에 찾아온 탈북민에게 복지혜택을 받는 길을 자세히 안내하고 필요하면 동행을 하여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담당공무원에게 부여된 본무일텐데 그것을 방기하였으니 이를 어찌해야한단 말인가. 그 탈북민이 자기 가족이라도 그렇게 했겠는가. 수비적이 아닌 선제적 행정, 지자체 책임 하의 복지안전망구축, 찾아가는 복지행정 등을 외친 지가 언제인데 지금도 이 상태인가. 기회 있을 때마다 국·주민들이 힘주어 주장하였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민·관의 협치(거버넌스) 필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여전히 관청의 문턱은 낮아지지 않고, 민본(民本)은 구두선에 그칠 뿐 군림 내지 선관후민의 행정편의주의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간 한국의 복지제도는 아는 사람만 받는(신청) 복지, 부양의무자 제도, 재정적 보수주의 등 3대 비현실적, 비본질적, 비합리적 복지제도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정부는 ‘아는 사람만 받는 복지’가 되지 않도록 원하는 대상자들에게 맞춤형 복지를 안내해 주는 ‘복지멤버십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이것들도 제대로 가동이 되지 않고 있다. 기초수급자들의 실질적인 수요를 충족시키는 민본적, 선제적, 적극적인 복지행정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자체를 중심으로 수준을 갖춘 사회안전보장망이 구축되어있다. 도·광역시, 일반시·군·구, 읍·면·동 및 사회단체 등의 연락망(네트웤)이 구축되어 있다. 이 연락망이 잘 가동되기만 해도 기초생활에 대한 복지를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다. 여기에 공무원들이 국민의 기본생활보호와 권익확보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 등이 수반되면 복지의 사각지대는 말끔하게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재정이 변수가 될 수 있다. 이 또한 무모한 사업에 예산을 투입하는, 예를 들면, 재정자립도가 최하위인 신안군에서의 101억짜리 바둑판 제작, 장성군에서의 1억 5천만 원 드는 싸이 공연계획 등의 낭비적 행사를 절제하면 된다. 복지 사각지대 제거에 대한 전방위적 노력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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