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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 추석 무렵
풍향계 / 추석 무렵
  • 동양일보
  • 승인 2019.09.10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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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아버지들은 참말로 어째 그랬을까, 나이든 딸들이 자기 아버지가 황제병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전기도 없던 그 옛날 어린 엄마가 옥양목 빤쓰까지 숯불피워 다려서 대령했다는 이야기, 새벽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던 게 일 때문만 아니라 바람으로 엄마 속 썩인 시절이더라는 아버지 젊은 시절 이야기들. 엄마들은 또 어떻게 살았을까, 바람난 아버지 잡으러 가서 문 밖에 놓인 신발을 보고 벌벌 떨다 화들짝 돌아오기도 했다는 이야기, 자식만 아니었으면 안 살았을 거라는 오래된 이야기를 듣다보면 황제병도 무수리 병도 이상하게 다 알던 것처럼 친근한데 친구는 그런 자기 엄마가 참 순하다고 새삼 감탄하기도 한다. 딸들에게 엄마 아버지의 이야기는 현실이기도 단지 이야기이기도 할까. 지금은 엄마가 면박을 주기도 하면서 여전히 아버지가 목울대를 울리기도 하면서 고만고만하게 사시기도 또 돌아가시기도 했다는 이야기들은 전설처럼 익숙하고 낯설다.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하는 모녀 사이는 불가사의해서 달달하고 애절한 것만은 아니어서 아들들 말을 빌리면 전생에 원수였을 만치 서로 소스라치는 날들도 많다. 엄마는 딸을 답답해하고 딸은 엄마가 사는 걸 못견뎌 하니 관습적 당위의 삶과 불가능한 현실의 여건은 부딪친다. 흉허물이 없으니 서로 어려움 없이 마구 대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그러려니 치고, 엄마에게만 계속 인내를 들이대고, 여태 잠잠하다가 왜 지금 난리를 피우느냐고 공 없는 소리를 치사하게 들이대기도 한다. 나는 못참아도 엄마는 참으라고도 하고, 어느 날은 왜 참았냐고 염장을 지르기도 한다. 난해한 것은 그러고도 좀 씩씩대다가 또 무연하게 만나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어릴 때는 집 안에 손님 오는 게 철없이도 좋았다. 집 안이 잔치처럼 바쁘게 돌아가고, 먹을 게 많아지고, 할머니와 엄마의 말소리가 나직나직해지고, 조용조용히 지내는 막중한 임무라도 맡은 듯 스스로 의젓해지는 일도 좋았다. 안성할아버지를 할아버지는 ‘사촌’이라고 불렀다. 반가움과 다정함을 잔뜩 담아 술상을 마주하고 두 분이 말씀을 나눌 때면 공연히 마루 끝을 왔다갔다했다. 엄마 심부름으로 어른들에게 뭔가 가져다 드릴 때면 어찌나 중요한 인물이 된 것같던지. 손님들은 과자나 사탕같을 걸 사다 안겨주셔서 토마토나 오이같은 닝닝한 입맛을 놀래켰다. 할아버지 두루마기 자락 같은, 걸으실 때 바람결에 날리던 옷고름같은, 곰방대에 담아 피우던 담뱃내 같은, 비오는 날 작은 방에서 나는 냄새같은 오래 된 일들은 이제 없다. 나는 수십년 전부터 이미 어리지 않고, 그 분들은 돌아가신지 오래되었으며, 일주일 넘어 손님들이 계시는 동안 빨래며 상차림에 설거지까지 엄마의 수고를 마침내 알게 된 지도 몇 십년이 되었다. 늘 바쁘기만 하던 엄마는 팔순이 넘은 지 한참 되어 명절이면 손과 발이 붓는 고생에서 비켜나게 되었다. 
세월이 갔고, 새로이 발명되는 기술들이 집 안 일을 분담해주는 이 시절, 과학의 발달은 딸들은 일상에서 엄마보다 독립시켰을까 물을 수 있겠다. 우리는 엄마들보다 많이 편해졌을까. 내가 읽는 글들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잘 생각해 보라고 한다. 세탁기나 청소기같은 도구들이 일상을 쉽게 해주는 대신 청결에 대한 우리 욕구가 높아졌다고 한다. 여러 번 입고 세탁을 하던 예전에 비해 한 번만으로 빨고, 집 안도 더 깨끗할 것을 기대하게 되었으며, 불을 때서 하지 않는 대신 음식에 대해서도 기대치가 높아지는 바람에 일의 양은 절대로 줄어든게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여성들은 밖으로 나가서 일을 하고 집 안의 가사도 해야하는 이중고에 놓였다는 것이다. 엄마는 본인 기준으로 이야기 한다. 여자도 다 나가서 일을 하는 시대여서 모두 고단하다고. 집 안에 엄마가 없으니 어린 애들은 천덕꾸러기 같고, 아들은 아내가 없으니 집에서도 일해야 하고 딸들은 안팎의 일들을 다 잘해야 하니 온 세상이 사는 게 고단한 시대가 되었다고. 그러니 어쩔 것인가. 모두 나가 무언가를 하며 사는 이런 시대에. 여성이 나가서 좋은 점이야 그대로 있겠지만 모두 동동걸음을 쳐야한다면 칠 수밖에는 없는 노릇이다. 엄마와 다른 방식으로 딸들이 바쁜 시대, 어른도 아이도 젊은이도 노인도 다 고단하다니 명절에는 후딱 만나고 얼른 흩어져 간단하게 먹고 자고 누워 지내는 피로풀기를 과제로 삼아야 하려나. 오랫동안 민족이 대이동을 하면서 모이는 일을 강박처럼 해왔으니 이번 명절에는,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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