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일본인 교사의 재일조선인 학생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협화교육’의 구상안에는 뒤떨어진 존재를 끌어올린다는 발상이 바닥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이는 동화의 입장에서 입각하는 한 필연적인 발상이었다. 여기에서 본래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재일조선인 학생들을 일본인 학생들과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하여 이렇게 저렇게 평가하는 방법이 도출된다. 그러한 시선에서 보면, 재일조선인 학생은 아주 뒤떨어진 일본인 상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일본인 학생을 기준으로 삼아 재일조선인 학생을 평가하는 것이 당시 공인된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를 교육 상식화시켜 말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런 식으로 파악된 재일조선인 학생의 실상으로 믿어지고, 교육의 장에 정착하게 된다.

‘협화교육’의 시기는 이러한 방법과 영상으로 아직 사실로 남아 있던 조선인의 생활이나 감성을 강제적으로 묵살하고 이를 교육 현장에서 전적으로 배제시킨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평가 방법에 의해, 당시 일본인 교사는 재일조선인 학생의 특징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부모에 대한 효심이 강하고 신체 건강하며 승부욕이 강하다는 것 등을 긍정적인 면으로 들고 있는 외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면을 열거하는 데 그치고 있다.

또 그렇게 된 원인을 가정생활의 존재 양식, 즉 부모의 책임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공통된 경향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역사적·사회적 원인에 대해서 까지는 관심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조선인을 멸시하는 현상과 그 이유가 고정되어 버렸다. 일본인 교사들에 따르면, 재일조선인 학생의 부정적이고 낙후된 면은 크게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천황제 사상을 아직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저한의 기준으로 반도의 아동이 “통치권자가 천황 폐하임을 모두 이해하고 신민된 자로서 오르지 충성을 다할 수 있는 해답에 접근하고 있음은 바람직스러운 일”이기는 해도, 그 체득에 이르러서는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바가 있다는 판단이다.

예를 들면, “축제일의 의의에 대해서는 의식교육(儀式敎育)과 기타에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일본인 아동에 비해 인식이 부족한 자가 현저히 많다. 황국민이 된 자로서의 서사(誓詞)를 낭독시켜보면, 5~6학년 정도 되어야 이를 철저히 이해하는 경우가 많고, 4학년 이하일 경우에는 일본 아동에 비해서 확실히 철저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이는 무릇 가정의 무자각에서 온 것으로, 가정교육이 철저하지 못함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일본인 학생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이고, 국방헌금도 내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고치는 재일조선인을 보면서 “지금의 반도인은 과거 종종 악평을 받았던 그런 조선인과는 그 질은 전혀 달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평가도 내리고 있다. 어쨌든, 천황제 사상의 체득이라는 시대적 기준에서 보아, 재일조선인 학생들은 뒤떨어지고 그 부모는 더욱 더 뒤떨어져 있다고 간주되었던 것이다.

둘째는, 재일조선인 학생의 학력은 상하 양 극단으로 나눠지고, 그 안에서도 낮은 쪽이 많다는 평가이다. 그 이유에 대해, 도쿄의 한 교사는 “(재일조선인이)집단을 이루어 살면 조선식 생활양식을 굳게 고수하여 일본화가 행해지지 않습니다. 아동이 귀가한 후 가정에서 조선식 생활을 반복하게 되기 때문에 아동에게는 이중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가정으로 돌아오면 학교생활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 결과 지능의 저하를 초래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가정의 민족적 생활을 ‘일본화’시키자는 사고로 연결되는 것이 당시 교사들의 사고방식이었다. 동시에, 그래도 차별은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성적지진아를 방기해 버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반도 아동의 성적은 양호란 경우와 극히 나쁜 경우가 다 있습니다.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성적이 불량인 학생이 있기도 하지만, 성적이 좋으면 小牧중학이나 中商에 진학하는 우수한 아동도 있습니다. 이들은 일본 아동에 비해 손색이 없습니다. 이처럼 성적이 좋은 학생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우리 일본 국체의 존엄을 알게 하여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정신을 심어주어 교육의 성과를 올리고 싶습니다”라는 식으로 우수한 아이들을 훈육시키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셋째로, 가장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으로 예의범절이 나쁘다는 점이다. 이것이 낮은 학력과 복합되어 고정된 재일조선인 학생 상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때 교사는 기묘한 여과장치를 작동시킨다. 예를 들면, 똑같이 성적이 좋은 학생일지라도 품행이 방정한 자는 “일본인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반도 아동에 비하여 세련되었다”라고 한 쪽으로 몰고, 반항적인 태도를 가진 자는 “반도적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고 다른 쪽으로 밀쳐내는 것이다.

교사들은 좋은 품성은 일본, 나쁜 품성은 조선이라는 편견으로 비춰지는 모습은, 한 교사의 경우, “정말이지, 반도 아동을 훈육하는 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호되게 매질을 합니다. 이런 방식은 성격을 더욱 포악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순순히 알아듣게 타일러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때문에 젊은 선생으로서는 곤란한 것이 당연하겠지요”라는 식으로 교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포악한 아이들로서 파악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반도인 자녀들을 개선시켜야 할 점으로서 “① 공덕심의 계발 배양 ②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관념의 양성 ③ 복장 단정 ④ 규율바른 생활에 길들이기 ⑤ 거짓말 하지 않는 습관 확립”을 들고, 이런 것을 예의범절로 가르치는 것을 방침으로 삼는 교사도 있었다.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과 유사한 점을 드는 교사는 많다.

그런데 일면에서는 조선 아동이 이처럼 무례한 것은 가난한 생활에서 나온 것이라고 간파하고 있다. 많은 반도 동포는 불행히도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고, 정리정돈이 되어 있지 못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불량한 환경에서는 불량 아동을 만들어내기 쉽고, 불량 아동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도덕심에 여러 가지 결점을 유발하기 쉽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예절교육을 계속 강화시키려 하였지만, 그것은 민족적 편견을 더욱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게 된 듯하다. 예를 들면, 앞에서 언급한 개선점에 대해서 ”이런 것들이 반드시 반도인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나, 반도인 중에서는 그러한 경향을 가진 자가 많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이는 결코 아이들만의 죄는 아니다. 학부형들이 위생을 생각하고 공중도덕에 눈을 뜨고 불결한 옷차림을 스스로 수치스럽게 느끼게 되면, 아이들이 그러한 결과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해서, 조선인 측에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있다. 편견의 필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 후의 동화 준비

이상과 같이 일본인 교사는 신민 의식, 학력, 예절의 세 가지 면에서 재일조선인 학생이 뒤떨어졌다고 보고, 그것을 초등학교의 정신으로 시정하는 것이 ‘협화교육’이라고 간주하였다. 이러한 ‘협화교육’에서 동화를 방해하는 최대의 배경으로 부모 세대의 민족성 유지를 들고, 특히 조선인 집단 거주에 대해 “집단을 이루고 살면 언어‧풍습‧관습 등 반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코자 하여 일본화가 쉽게 행해지지 않는다”면서, 이것을 여러 악의 근원인 것처럼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서의 조선인의 엄존에 직면하여, 이를 인식하고, 강권적인 ‘협화사업’과 더불어 이러한 현실을 배제하려 한 점에도 ‘협화교육’의 시대적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가정생활로부터의 동화를 지향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일본인 학생을 기준으로 삼아 재일조선인 학생을 재단하는 방법, 재일조선인 학생을 뒤떨어진 일본인상으로 묘사해 버리는 방법과 영상이, 설령 황민화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도된 것이라 해도, 그 반면에는 사회생활에 뿌리박으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측면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황민화 이데올로기가 부정된 후까지도 이러한 것은 사회적으로 계속 살아남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새로운 사회 현상의 발생에 조응하는 하나의 ‘실감(實感)’이 형성되었다. 1930년대 후반의 교육 현장에는 재일조선인 자녀와 일본인 자녀를 구별할 수 없는 현상이 확산된 듯하다.

일본인 교사의 눈으로 보아, “이들은 일본 출생자와 모두 같아서 구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직원도 아동도 무의식적으로 일상 학교생활을 계속해 나가고 있는” 현상이 생기고, 게다가 “고학년의 아동들 중에는 김, 최, 박, 이 등의 성을 가진 아이들이 많이 있지만, 저학년은 시게미츠 준타로(重光純太郞)이라든가 가네미야 다마코(金宮玉子)라든가 하는 호적 이름을 붙이고”, “일본 출생자와 같은 성명을 가진 아이들이 많아지게 되는“ 상황이라 더욱 구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 실감이 나옴으로써 위로부터의 ‘적자’론과 아래로부터의 ‘동정’론에 기초하는 ‘구별하지 않는다’(일본으로 취급한다)는 자세는 교육의 장에 더욱더 깊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 ‘실감’은 일본이 패전에 의해서도 변용되지 않고, 전쟁 후에도 계속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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