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선 충북특수교육원 특수교육과장

김태선 충북특수교육원 특수교육과장

[동양일보] “에구머니”

“(소근 소근)아니, 기차에서도 멀미를 하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가장 창피했던 순간 중 하나이다. 멀미가 심해서 가급적 차를 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버스 특유의 냄새가 나면 오래 버티지를 못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기차는 괜찮을 것 같은데...’하는 마음에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당시 모든 기차역에 멈추는 비둘기호는 서로 마주 보도록 구성되어있었는데, 참다가 힘들면 화장실에 가던지 비닐봉지를 사용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린 마음에 계속 참아보려다 덜컹하는 기차의 흔들림에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발밑에 그만.... 당시 상황을 쳐다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만든 내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고, 몇몇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앞에 앉은 분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겹쳐 당시의 장면은 내 굴욕적인 역사의 한 컷으로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

멀미를 심하게 하고, 심지어는 기차에서도 멀미를 하는지라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야할 때면 귀 밑에 붙이는 태그를 붙이고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래서 초보 교사시절 어느 날인가는 학생들을 인솔하고 수학여행을 가야한다는 긴장감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귀 밑에 태그를 붙이고 세수를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약이 눈에 들어가서 한 쪽 눈의 갈색 홍채가 사라졌다. 온 세상이 마치 텔레비전의 명암 밝기를 최대로 크게 해놓은 것처럼 허옇게 보였다. 피터팬에 나오는 애꾸눈 후크선장같이 안대를 하고 수학여행에 학생들을 인솔하면서도, 멀미가 날까봐 그 원인이 되었던 귀 밑의 태그는 떼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주에 계신 칠순이 넘으신 할머니를 모시고 제천까지 오라는 부모님의 특명(?)이 떨어졌다. 부모님 모두 바쁘셔서 청주에서 할머니를 제천까지 모시고 갈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멀미대장인 내가 할머니를 모시고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하고 걱정하는 마음과 ‘그래도 이제는 제법 한 시간 정도는 잘 참고 버스를 타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엇갈렸다. 터미널에 도착해보니 명절 밑이라 모든 버스들이 만원이었다. 어떻게 간신히 한 자리를 확보하고 할머니를 자리에 앉혀드렸다. 할머니 자리를 확보하느라 귀 밑에 붙이는 태그를 살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버스를 타고 바로 출발하면서야 비로소 ‘멀미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혼자만을 걱정하면서 버스를 타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멀미에 시달렸는데,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시는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를 잘 모시고 가야한다는 책임감 때문인지, 할머니가 앉아계신 옆 통로에 서서 오랜 시간 타고 가면서도 멀미가 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생각했다. 사람의 정신력은 참 신기하네.

우리나라 역사의 주요 획을 긋는 독도를 가보고 싶다. 그런데 버스와 배를 멀미 없이 그렇게 잘 타는 사람들조차도 독도를 갔다 와서 한결같이 내게 전하는 말이, ‘배 바닥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고 한다. ‘화장실 앞에서 떠나지를 못했다’고 한다. 어휴... 내가 독도를 가볼 수 있을까? 처음에는 독도에 일반인들을 위한 공항(독도의 크기는 생각하지도 않고)이 들어서면 좋겠다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면 독도를 가볼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 누군가를 보호하면서 책임감을 가지고 배를 타면 이번에도 멀미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글쎄, 선뜻 시도해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어쩌다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항상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 인생에 독도는 없어.”

우리나라가 일본과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고 사이좋은 친구이어서, 일본이 독도를 욕심내지 않고 우리나라의 다른 영토 같았다면, 그래서 독도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하였다면 내가 독도를 가지 못하는 것이 덜 억울할 텐데... 지란지교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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