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겸 문학평론가

이석우 시인 / 논설위원 겸 문학평론가

[동양일보]초정행궁사업은 165억 7000만 원을 들여 내수읍 초정문화공원 일원에 부지 3만 7651㎡, 건축 2055㎡ 규모로 지난 2017년 12월 착공하여, 초정약수축제가 열리는 올 5월 30일 정식개장을 앞두고 있다. 청주시는 앞으로 초정행궁을 중심으로 2021년 마무리되는 초정클러스터 사업을 추진해 "세계3대광천수'로의 명성과 초정약수의 치유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홍보…치유관광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 라고 한다.

이 계획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청주시의 문화예술사업에 대한 마인드의 수준에 대해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대왕의 초정행궁의 목적은 한글창제 마무리와 안질 치료에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세계문화유산인 한글창제 부분이 조명되어야 마땅할 것이나 초정클러스터 치유관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당연히 초정행궁 사업은 한글문화관의 비롯한, 야외음악당, 야외영화공연장, 미술, 조각, 공예, 시화 등의 전시회장, 연극 무대 등이 조성되어 초청행궁을 찾는 외지인들이 청주의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돌아갈 수 있는 청주 문화예술의 성지로 거듭나야할 것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초정행차에 대하여 『동국여지승람』은 "초수(​椒水)는 고을 동쪽 39리에 있는데 그 맛이 후추 같으면서도 차고, 그 물에 목욕을 하면 낫는다. 세종과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행차한 일이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1444년 1월 27일 청주목 초수리(초정)에서 초수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궁궐에 들리더니, 2월 3일에는 아예“물맛이 호초(후추) 같은 것이 있어, 초수라 하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라고 약수의 효능까지 전해지자 궁궐의 대신들은 매우 고무되었다.

당시 훈민정음 반포(1446년)를 2년 앞둔 세종은 안질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종실록』등에는 방대한 독서량 탓인지 눈이 매우 아팠다는 기록과 함께 책읽기도, 정사도 어려워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다가 소갈증(당뇨)까지 앓던 터라, 대신들은 너나없이 초수리로 행차하여 병을 치료할 것을 권하기에 이른다.

왕은 1444년 2월에 내섬시윤(공물공납을 담당하던 벼슬) 김흔지로 하여금 초정에 행궁(임시 왕궁)을 짓게 하여 한 달여 만에 행궁을 마련한다. 한 겨울에 서둘러 완성해야 했던 탓에 기와를 얻지 못하고 이엉으로 지붕을 덮은 수준이었다.

왕은 한양~영남대로~죽산~진천 등 280리 길을 거쳐 5일 만인 2월 28일 초정에 다다랐다. “임금과 왕비가 초수에 거동하니, 세자가 임금을 따라갔다.”라고 『세종실록』은 적고 있다. 같은 해 7월 22일 김흔지가 초정에 나타난 기록은 보이지만 행궁을 수선할 요량이었는지, 초가를 기와로 바꿀 목적이었지 상세한 기록은 없다. 왕은 9월에도 거둥하여 모두 123일간 초정약수를 마시며 몸을 씻는 등의 치료를 하게 된다.

그런데 『세종실록, 26년 2월20일』을 보면, 주목할 기록이 발견된다. 훈민정음 반대파인 최만리가 “언문 연구는 급한 것도 아닌데 행재(초정 행궁)에서 급급하시어”라고 불만스러운 상소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도 세종의 넉 달간의 초정행궁은 훈민정음 반포 사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행궁은 4년 뒤인 1448년 3월 28일 초수리 주민의 실화로 불타버렸는데, 세종은 농번기를 감안해 실화범을 한 달여 만에 방면해 주었다. 이 후 세종은 신하들이 초정 거둥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백성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점을 거론 하였으나, 이미 반대파의 방해를 피해 훈민정음 사업을 종료한 까닭에 초정행궁으로 거둥할 필요가 없어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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