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동양일보]노란 문이 달린 카페가 있다. 아버지 시대 중절모처럼 중후한 간판 아래 앙증맞은 노란 빛깔 문은 어울리지 않게도 친근하다. 마치 아는 이 없는 낯선 여행지에서 막 받아든 반가운 초대장 같이 문은 안쪽까지 노랗다. 겨울 끝 무렵이라 밝은 빛이 새삼스러울까. 비 내리는 날 우산을 털며 들어선 카페는 동백 아가씨처럼 상냥했다. 언제 저런 빛을 보았더라, 대학에 원서를 내고 결과를 기다리던 지루한 때 가로수 무성한 길을 걷고 있을 그 때 마침 눈이 내렸던가, 머리 위로 눈이 쌓여 머리칼이 젖고 신발이 질척댈 때쯤 길 옆 다방에 들어섰다. 다방 안은 밝고 따뜻하고 아늑했다. 장작을 피우는 난로였던지, 불 앞에 한복을 입고 있던 여성이 곱게 웃으며 춥겠다고 따뜻한 자리를 권했다. 난로 가는 안온하고 녹작지근했다. 따뜻한 공기 속 세상에서 마담은 상냥하고 아름답고 우아해보였다. 그 아름다움 앞에서 젖은 머리카락은 민망스러웠다. 한복 치맛자락이 나비같았던 건 기억의 왜곡이려나. 그 때 한 손으로 잘 모아 잡던 그 마담의 치맛자락이 어쩌면 노오란 빛이었을까.

문이 노란 카페는 오래 전 본 적있는 장소처럼 문문해졌다. 그적거리기도 행인들 내다보기도 책을 들여다보기도 어느 때 흐느끼는 노래소리로 공간 전체가 축축해질 때는 멀미가 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근처에 갈 적마다 그 곳에 들른 건 노란 색의 초대 때문이었을까. 집을 떠나 섬에서 달포 넘게 늘정대며 사는 호사는 그래서 노란 빛처럼 상냥한 시간대인걸까.

세계를 오염시키는 바이러스 덕에 일정이랄 것없는 일상이 더 느릿해지고 덕택에 숙소 주변을 걷고 숲을 다니게 되었다. 숲으로 가는 길 발밑 쯤에는 제비꽃, 어릴 때 마당 가에 지천으로 피어나 꽃을 따 반지를 만들기도 하던 보랏빛 작은 꽃이 이 남쪽 섬에도 어린 친구처럼 피어있다. 꽃도 보고 나무도 보자는 숲은 정작 그곳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넓은 데로 나가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오래된 숲은 오래 자란 나무들이 시간의 두께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할아버지 두루마기 옷고름 같은 오래된 숲의 한요로움, 숲으로 나가는 일은 시간을 만나는 일이기도 한지, 숲 속 수령 육십년이 가깝다는 삼나무들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나무의 키는 시간의 흔적, 숲의 장엄은 시간의 집적일 터, 앞으로 또 시간은 숲을 얼마나 더 채울지. 시간은 숲을 울울하고 창창하게 채워 가는데 사람이 살아낸 시간은 어디로 가서 도타워지고 있는지. 나무를 심은 뜻과 잘 자란 나무들의 장함과 앞으로도 지켜져야 할 풍경 같은 과거 현재 미래 세 겹의 시간이 숲에는 살고 있다. 숲에 들어서 만나는 것은 정작 풍경을 넘어 시간의 숭고함과 불가사의함이, 목숨의 의미같이 장엄한 것들인가.

바이러스의 어지러운 시국 잘 넘어가 보기로, 어쨌거나 내남없이 중한 목숨의 소명을 생각하며 살아내는 걸로 한껏 고양되어 가는 참에 숲에서 맡는 담배 연기, 좁은 길에서 여럿이 큰 소리 내면서 조심성없이 몸 부딪쳐 가는 건 무도해다는 생각이 와락 솟구치는 것이다. 유행성 바이러는 비말 전염될 수 있다고 마스크 꼭 하라는 계몽은 의미가 없는 모양이다. 사람이 모이면 위험이 높아진대도 광장은 종교 외피 두른 정치 선동이 시끄럽고, 스스로 격리해야 할 사이비 집단은 말과 달리 밀행을 계속한단다. 혐오를 혐오해야 한다고, 한 집단에 대한 혐오는 공동체의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기제가 되기도 하지만 제발 종교 이름으로 상식을 무시하는 행위는 없었으면 좋겠다. 종교의 사이비성은 포르노처럼 가학적으로 사람을 조각낸다. 포르노는 사람을 성기만 있는 인간으로 만들며 모독하고, 사이비종교는 인생이 종말론만 있는 것으로 협박해서 일생을 불안하게 만든다. 인간은 볼품없고 일생은 허무해져 버린다. 공통의 이해관계와 공통의 윤리를 우리는 상식이라고 부른다. 탐욕처럼 들이대는 천국은 어쩌면 천국이 아닐지 모른다. 예수를 믿는 일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죽어 천국에 가는 일이 전부라면 물을 수 있다. 기대하는 천국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는지. 사이비 교주치고 가난한 이를 못보았고, 사이비 종교치고 말세로 협박하지 않는 교리를 본 적이 없다.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려면 제 욕망 앞에 남들 앞세우는 일, 탐욕부터 점검해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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