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 논설위원 / 소설가

[동양일보]마을에 들어온 사람이 한 젊은이를 만났다. “말쌈 좀 섞어보겄습니다. 이 동네에 참봉어른 기시지유 그 어른 댁이 어딘가유?” “왜 그러시우?” “아, 기냥 뵈러 왔읍죠.” “잘 아는 사이유?” “아니 기냥….” “절루 가보우.” “절루유. 이 동네 절이 있어유. 그 참봉양반이 절에 사셔유?” “아니, 절이 아니라 저 쪽으루 가보란 말여유. 그 사람 어째 말귀를 통 못 알아듣는구먼.” “지가 그리도 못마땅허유. 왜 아까부터 지를 흘겨보믄서 대답에 성의가 없어유?” “나 원래 그런 사람이유. 무슨 일로 그 사람을 찾는지 모르겄으나 빨리 가봐유.”

마을에 들어온 사람이 찾는 참봉양반은 이 마을의 개다리참봉을 말한다. ‘개다리참봉’이란, ‘돈으로 참봉벼슬을 사서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을 꼬집어 말하는 것으로, 원래 이 사람은 일반상민인데 종구품의 벼슬인 참봉벼슬을 사서 양반 노릇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그의 거드름에 눈꼴이 사나워 뒤에서 양반취급을 안 해 주는 판에 이를 찾는 외지의 낯설고 엉뚱한 말을 하는 허름하게 보이는 사람이니 이를 대하는 말이 곱지 않고 시선이 바르게 나갈 리 없다.

그도 그렇지만 사실은 이 동네 사는 그 젊은 사람은 이름이 명준이로 ‘흑보기’다. 흑보기란, 눈동자가 한 쪽으로 몰려서 상대를 볼 때 늘 흘겨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이를 모르는 외지사람이 볼 때는 흘겨보는 것으로 보일 터이니 오해할 만도 하다. “그 외지사람 말여, 알고 보니, 자기도 양반이 돼 볼 심산으루 돈 얼마나 쓰구, 또 어떡하면 참봉을 살 수 있는지 그 개다리참봉한테 물어보러 왔다는구먼.” “그로 보면 참 양반이 좋긴 좋은 거구먼 그랴.” “자네 그거 몰러 그러나. 개다리참봉 보게. 제가 언제 쩍 양반이라구 에헴 하며 긴 곰방대 물구 여덟팔자걸음으로 거드름피우지 않는가. 그래두 보는 앞에선 동내사람 모두가 꼼짝 못하잖여?” “오죽하믄 그 흑보기가 그 거드름피우는 개다리참봉 아니꼬워서 그를 찾는 사람조차 허름하게 대했겠는가?” “그 흑보기 말이 나왔응께 말이지, 아무 말 하지 않구 쳐다만 봐두 흘겨보는 것같이 보일 테니 그 외지사람이 기분 나쁘게 여길 만두 하지.” “근데 왜 그 외지사람 말여, 기분 상했으면 그 자리에서 흑보기와 두잽이를 하든가 시시비비를 따지든가 할 일이지 뒤에서 만나는 동네사람마두 그 흑보기 욕를 햐 욕을 하긴.” “그러는 자네는 왜 그 외지사람을 그냥 두었는가 그 자리에서 혼돌림이래두 주지 않구?” “그래두 우리 동네를 찾아온 손님인데 차마 그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참았제.” “그려 이 사람 말두 일리는 있어. 그래서 하는 말인디, 개 못된 것은 들에 가서 짖는다구 했어. 덜 된 사람은 쓸데없는 짓을 잘한다 이거지.” “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개하구 똥 다투랴. 는 말두 있지. 본성이 니쁜 사람은 더불어서 견주거나 다툴 수 없다는 거지.” “자네들 ‘발괄’이라는 말 아는가. 내도 선친에게서 들은 말일세. 즉, 옛날 관아에 대하여 억울한 사정을 조리 있는 글이나 말로 하소연하던 일이라네….” “그런데 그 말이 시방 무슨 관련이 있다구 꺼내는가?” “있네. 그 개다리질하는 즉, 방정맞고 얄밉게 구는 그 외지사람의 두서없는 말과 관련이 있네. 무슨 말인고 하니, ‘개 쇠 발괄 누가 알꼬’ 라는 말이 있어. 곧, 개하고 소가 발괄하는 걸 누가 알겠는고. 하는 말인데, 조리 없이 하는 말은 아무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지껄여 대는 그 외지사람 말은 상대할 게 못 된다는 얘기야. 이만하면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여하튼 흑보기 말여, 승질두 꼬장꼬장하지만 그느무 눈 때문에 구설수가 많어.”

개다리참봉은 동네서 양반취급을 눈에 보이게 해주지 않고, 뒤에서 손가락질 하는 걸 의식했던지 그 자식들이 부모를 설득해 가산을 정리하여 마을을 떠나 먼 곳으로 갔단다.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하는 지 아무도 모른다.

흑보기는 결혼을 하지 못하고 아니 본인이 하지 않고 나이 50여세가 되도록 홀아비로 있었는데, 부모가 혼자된 자식을 애석해 하며 한 많은 삶을 살다가 다 죽자 대처로 시집간 파뿌리의 그 고모가 60이 다된 그의 눈을 고쳐보겠다며 데리고 가더니 그 후 소식을 모른단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90도 넘었을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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