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영 논설위원/유원대 교수

백기영 논설위원/유원대 교수

[동양일보]산업혁명과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주택가 내 무분별한 공장의 설립은 공해, 슬럼화와 함께 질병을 일으켰다. 상·하수도에 대한 환경위생, 공해에 대한 대책, 전염병과 질병의 예방은 도시계획을 통해 사회개혁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산업혁명 시기에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노동자는 열악한 노동, 생활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이로 인한 콜레라, 결핵의 확산으로 영국은 높은 사망률, 평균수명의 단축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장시간의 노동과 저임금, 화장실조차 변변치 않은 노동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은 전염병의 발생을 두려워하며 살아갔다. 당시 참혹했던 노동자들의 주거환경은 전염병의 창궐을 일으켰으며 노동계층의 열악한 주거환경 개선에 대한 절실함과 필요성을 대두시켰다. 슬럼에서 발생한 전염병은 노동자의 주거지구에서 그치지 않고, 부유층의 주거지구까지 퍼져 사회 전반을 공포로 물어넣었다. 노동력 저하로 인한 채산성의 악화와 전염병으로부터의 생명보호는 도시환경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개혁 차원의 도시계획 추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도시 환경개선에 앞장선 이들은 의사들이었다. 맨체스터에서는 1784년 발진티푸스의 유행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에 이르렀다. 의사들은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의료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동시에 노동자 지구의 개선 운동을 펴나갔다. 1796년 대규모로 발발한 발진티푸스가 도시 전체를 휩쓴 후 맨체스터 위생국이 설립되었다. 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건강의 사회문제화와 위생개혁 운동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1848년 세계 최초로 공중위생법과 보건국이 창설되었다.

1854년 런던 전역으로 콜레라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도시의 빈민계층 밀집 지역에서는 협소하고 누추한 화장실을 다수가 공용으로 사용하였고 오물과 하수는 템스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의사 존 스노는 콜레라의 원인이 오염된 하수임을 확인하고 콜레라 확산을 막게 된다. 이후에 런던 시는 스노의 의견에 따라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게 된다.

19세기 파리는 급속한 도시화와 함께 인구의 팽창을 경험하게 되는데, 1801년 약 55만 명에서 1851년 약 100만 명으로 50년 동안 인구는 약 2배 증가하였다. 19세기의 가장 큰 전염병이던 콜레라는 1832년 파리에서 1만 8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콜레라를 비롯한 각종 전염성 질병은 열악했던 저소득 계층의 밀집 지역에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지저분한 파리의 도시환경은 무서운 전염병이 번지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전염병에 대한 대처는 도시환경의 대개조로 이어졌다. 1853년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을 센 지사에 임명했고, 그는 파리의 도시개조를 주도했다. 그의 이름을 딴 오스만화는 이후 세계 곳곳에서 근대적 도시 정비 모델로 일컬어졌다. 오스만화로 인한 도시 구조의 변화는 도로, 상하수도, 공원녹지의 정비로 나타났다. 도시 소통망의 확충을 위해 대로를 신설해 도시의 구도심과 새로운 외곽 지역을, 센 강의 동서 지역을, 도시의 남북과 동서를 체계적으로 연결했다. 또한, 상하수도망과 녹지 공간을 확대했다. 상수도는 약 750㎞에서 오스만화 이후 약 1550㎞로 증설되었고, 1854년 약 160㎞이던 하수도는 1870년 약 540㎞로 확대되었다. 쾌적한 자연환경으로 불로뉴 숲과 뱅센 숲이 정비되었고, 도심 곳곳에 다수의 공원이 조성되었다. 여러 공공건물인 기차역, 병원, 극장, 경찰서, 학교, 교회, 센 강의 다리, 시장 등이 건설되고 정비되었다. 파리의 대대적인 도시 정비는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던 전염병과 도시 폭동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대로 건설과 교통망 정비 그리고 위생 설비 확충을 최우선순위에 두었다.

북쪽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함부르크는 물의 도시로 강에 인접해 있는 집들의 화장실에서 나온 오물은 강으로 바로 유입되었다. 19세기 말 함부르크는 콜레라의 아성이 되었고 결국 1890년 끔찍하게 발생한 콜레라 사망자는 2백 명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두려움 때문에 도시를 떠난 사람들을 통해 콜레라는 30개 도시로 퍼져 나갔다. 1859년에 여과 장치가 있는 수도를 설치하면서 비로소 콜레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98년 함부르크시는 지주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가정위생법을 통과시켰다. 다른 지역도 함부르크의 사례를 보고 위생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상하수도 시설 등 새로운 위생시설 덕분에 콜레라는 19세기 말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

상하수도 시설, 위생시설의 정비가 전염병의 확산에 실질적인 예방책을 제공하였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개인과 사회의 건강하고 안전한 삶에 있어 도시는 직접적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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