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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문화재 베일을 벗기다(7)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 55호) 사명당의 길(4)
숨어있는 문화재 베일을 벗기다(7)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 55호) 사명당의 길(4)
  • 동양일보
  • 승인 2020.03.26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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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원장
금동판 탑지
익산 미륵사지 석탑
팔상전
법주사전경

[동양일보]불교를 도입한 동양 삼국에서는 각 나라의 환경과 생산 조건에 의해 탑파(塔婆)가 발달되었다. 중국은 일찍부터 강의 범람으로 생겨나는 진흙을 활용해서 만든 벽돌이 대부분의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으므로 탑을 조성하는데도 벽돌을 이용한 전탑(塼塔)이 크게 발달하였다.

일본은 해양성기후로 인하여 나무가 잘 자라나는 환경으로 인하여 목탑이 발달되었다. 지금도 일본에는 교토의 법륭사 5층 목탑을 비롯해서 7세기경에 만들어진 목조탑들이 여러 기가 현존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불교초전 시기인 삼국시대에는 목탑이 융성하였으나 6세기 후반부터 석탑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목탑을 석탑으로 전환하였는데, 그 시원을 익산의 미륵사지석탑과 부여 정림사지석탑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화강암재의 석탑이 크게 발달하여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탑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을 “석탑의 나라”라고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은 전탑의 나라. 일본은 목탑의 나라,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도 6세기 후반까지는 목탑이 성행하였으나, 목탑은 내구성이 약한데다가 많은 전화(戰禍)를 겪으면서 소실되어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고대에 조성된 목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2018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법주사에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이 고색창연한 자태로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 법주사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팔상전은 외형적으로 5층 목탑이 분명한데 왜 목탑이라고 하지 않고 팔상전이라고 할까? 이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에서부터 출가. 설산수도. 득도와 열반에 이르기까지 생애의 여덟 단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어 이 목탑을 팔상전이라고 한다.

1968년 현재의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에서 기울어져가는 팔상전을 완전히 해체한 후 중건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9월 21일에 팔상전의 중심기둥인 심주(心柱)를 들어내자, 심주를 받치고 있던 심초석의 상면에서 방형의 사리공이 노출되었고 사리공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팔상전은 정유재란 때에 소실된 후 새로 중건되었는데 원래에 있던 석조기단 위에 목탑을 다시 세운 것이므로 이 사리장엄구는 한국의 목조탑파 내부에서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유일한 예 가되고 있어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방형사리공 내부의 4벽면을 장식한 금동판과 그 위를 또 다른 1매의 금동판이 덮고 있어 모두 5매를 조합하여 마치 사리구의 외함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는데, 이 금동판 5매는 처음부터 분리하여 제작되었다.

사리구의 외함 역할을 하고 있는 이 금동판의 내‧외면에는 많은 글자들이 각인되어, 이 금동판은 탑지(塔誌)로서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 중에서 사리공의 남쪽 면에 장착되어 있던 금동판의 안쪽 면에 ‘萬曆二十四年 丁酉九月 日 倭人盡燒/爲白有去乙壬寅十月 日 化主 0 開人/乙巳年三月念九日 大高柱 立柱/李 時 代/朝鮮國僧大將 裕淨比丘’라는 글자가 각인되어 있다.

탑지의 내용에 의하면 팔상전이 선조 30년(1596년) 정유년 9월에 왜군들에 의해 전소되었고, 8년 뒤인 선조 38년(1604년) 시월에 팔상전의 중건을 시작하여 다음해인 을사년 삼월 구일에 목탑의 중심인 심주를 설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탑지의 말미에 ‘조선국승대장 유정비구’라고 쓰여 있어서 팔상전의 중창을 사명당이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명당의 법명인 ‘유정’은 생각할 유(惟) 와 정사 정(政)자를 쓰는데 비해 이 탑지에서는 너그러울 유(裕) 와 맑을 정(淨)자로 표기하였다.

비록 글자는 다르지만 유정과 동음어(同音語)일 뿐만 아니라 조선국승대장으로 밝히고 있어 선조 대에 전국의 의승병을 총괄했던 8도 도총섭이자 승병대장이었던 사명당 임을 알 수 있다.

사명당은 팔상전의 탑지에서 뿐 만 아니라 다른 기록에서도 간혹 유정(裕淨)으로 기록한 예가 있으므로 글자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된다.

팔상전의 중수는 사명당이 강화정사로서 도일하기 2년 전의 일이며, 당시에 속령 59세인 사명당이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임란으로 피폐된 여러 사찰의 중창불사에 매진하던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명당의 충북지역에서의 활동은 임진왜란 전부터 있어왔다. 그가 숭선사 불사의 책임자였음은 앞서 밝힌바 있다. 전후에 사명당이 강화정사가 되어 일본으로 가는 노정에서 충주, 단양, 죽령을 지나면서 단양에서 하루 밤을 보내며 지은 시(詩)와 죽령을 넘으면서 남긴 ‘유 죽령’이라는 시를 통해 그의 행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충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제천 신륵사에 사명당이 들렸을 가능성이 높다. 신륵사에 현존하는 ‘신륵사중수기’에 이 사찰의 중창불사를 사명당이 하였다고 적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듯 신륵사에는 ‘사명대사행일본지도’를 그린 벽화가 유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명당이 임진왜란 때 의승병장으로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승려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의 공적이 매몰되는 일 들이 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기득권층이던 유생들에 의해 그의 행장이 평가절하 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사명당을 비롯한 의승병의 활동은 전쟁 초기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기만 하던 전황에서 조선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변곡점이 되었던 것이다. 사명당은 왜란이 종식되자 서둘러 강원도 오대산으로 가서 월정사의 중창불사에 매진하였다. 그것은 전후에 새롭게 재판(再版)한 조선왕조실록의 보관처인 오대산사고(史庫)를 신축하고 그에 대한 관리를 월정사스님들이 맡도록 국가의 중요정책과 그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법주사에 사명당이 복원한 팔상전이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사명당에 의해 팔상전이 중건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는 단 1기의 목조탑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팔상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목탑으로서 신앙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찰경관에 보편적 가치를 더하였기에 법주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화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세계 문화유산 ‘법주사와 팔상전’, ‘법주사와 사명당’. 사명당과 충북지역의 인연은 이렇듯 소중하게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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