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서연 청주 경산초등학교 보건교사

 
황서연 청주 경산초등학교 보건교사
황서연 청주 경산초등학교 보건교사

 

[동양일보]코로나-19로 세상이 난리다.

봄꽃이 환하게 피는 좋은 계절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자주 가던 탁구장에 발길을 끊은 지도 오래되니 몸이 근질근질하고 답답하다. 그래도 이번에 코로나-19의 위기를 겪으면서 새로이 느낀 것이 많다.

선진국이라고 불렀던 나라들에게 한국이 감염병 위기 대응의 모범국으로 인정받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인의 우수성과 잠재력에 부쩍 자부심이 커졌다.

편리하고 친절한 교통체제, 남의 물건에 좀처럼 손대지 않는 높은 도덕성, 어디서든 손쉽게 인터넷 세상에 접속할 수 있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로바로 개선하는 현명하고도 빠른 업무처리능력 등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뿌리 깊은 남성 중심 성문화이다.

성교육을 하다보면 음란물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남자라면 야한 동영상(음란물)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는 것이다.

남자라면 그 시기 성충동은 억제하기 힘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음란물을 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이다. 어떤 유명 예능인이 예전에 야한 비디오 보는 취미를 갖고 있다고 개그 소재로 말했을 때 대부분 웃어넘겼다.

인기 시트콤에 출연한 점잖은 이미지의 할아버지 탤런트가 ‘야동○○’라는 별명으로 인기를 끌었을 때도 다들 재미만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음란물은 야동이란 이름으로 희화화되고 개그 소재가 되고 그렇게 술에 탄 물처럼 희석되면서 그 민낯이 가려져 왔다.

내가 발령받고 처음 몇 해 동안에는 사춘기 아이들의 신체 변화에 적응하는 성교육 몇 시간을 하는 것이 한 해 성교육의 전부였다. 그러나 9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성폭력 예방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중에도 적지 않은 아이들이 이런저런 통로를 통해 야한 영상을 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데다 성폭력 가해자의 상당수가 음란물 중독과 관련이 있어 음란물 예방 교육은 중요했다.

스토리도 사랑도 없고 오직 과장된 성행위만 있는, 화면 가득 여자의 육체가 강조된 음란물은 아이들이 볼 것이 아니었다. 음란물 속의 성은 결코 아름답지 않을 뿐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온 건전한 성 가치관을 일시에 허물어뜨릴 것이었다.

음란물이 야동이라는 흥미로운 이름으로 떠도는 동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불법 촬영물, 성착취물이 됐다.

N번방 사건이 터지고 전 국민의 공분으로 국민청원 열기가 뜨거워지자 여당야당 할 것 없이 강력처벌, 법 개정 등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에서 성착취물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간의 음란물, 불법촬영 영상물과 성착취 영상물은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찍거나 만든 이는 대부분 남자가, 화면 속은 여자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특별히 어떤 소수의 극악무도한 범죄가 아니다. 그동안의 수도 없는 성폭력 사건들을 반성한다고, 초범이라고, 공부를 잘하는 젊은이의 앞길이 창창하기 때문에, 성에 대한 호기심에 한두 번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지나치게 너그러운 태도로 묵인, 허용해온 결과다.

오히려 피해자더러 밤늦게 다녀서, 짧은 치마를 입어서, 가해자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낀 것이 아니냐, 왜 죽을 만큼 반항하지 않았나 등의 시선을 보낸 결과다.

디지털 세상에 노출되는 것은 되돌리기도 삭제도 쉽지 않다. 밤거리 한번 마음 놓고 다닐 수 없었던 여자들이 이제는 디지털 세상에서도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 예방 교육,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어른들이 평소에 하는 행동과 주변 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면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열어보는 인터넷 세상에서 유치원생도 쉽게 음란한 영상을 접할 수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우정이랍시고 야한 영상을 카톡으로 주고받고 있는 한 제2, 제3의 N번방은 계속 나올 것이다.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예방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개인 방역이다.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가 아니라 ‘나부터 시작하자’라는 마음으로 자신과 타인의 안전을 위하여 다소 불편해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씻기를 잘하며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전화로 마음을 전하는 일처럼, 바람직한 성문화를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친구로부터 야한 영상이 날아오면 냉큼 재생을 누를 것이 아니라 곧바로 삭제하고 ‘이런 거 보내지도 받지도 말자’라고 답장을 보내자. 적어도 디지털 선진국에서 이런 품격 정도는 지킬 수준이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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