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송은 온양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여송은 온양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동양일보]따뜻할 온溫, 볕 양陽. ‘온양’은 이름에서부터 따뜻함이 묻어있다. 현재는 아산시로 개편되어 행정구역상 ‘온양시’라는 곳은 사라졌지만, 같이 지내온 세월 때문 인지 왠지 모르게 ‘아산’보다는 ‘온양’이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온양이라는 지명은 따뜻한 물이 솟는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지명에 얽힌 설화에는 겨울에도 땅이 잘 얼지 않고, 농부들이 땅을 팠는데 뜨거운 물이 콸콸콸 솟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온양의 과거 지명을 보면 더욱 잘 나타나는데, 백제시대에는 ‘탕정湯井’, 고려시대에는 ‘온수溫水’, 조선시대 이후에는 ‘온양溫陽’이라고 불리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왕들이 온양에 행궁을 짓고, 치료와 휴양의 차원으로 온천을 찾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과거 온양은 소위 지금 말하는 ‘핫플레이스’였다. 1960년~70년대에는 신혼부부들의 신혼 여행지로 가장 인기 있는 곳이었고, 또한 야간통행금지가 엄격하게 지켜지던 시절에도 경주, 동래, 도서지역들과 더불어 통행금지 제외 지역이었다. 1980년대~1990년대에는 전국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시끌시끌하였다.

이런 온양 역사와 더불어 터줏대감처럼 지역의 문화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온양민속박물관’이다. 온양민속박물관은 도서출판 계몽사의 회장인 구정龜亭 김원대金原大 회장이 설립한 사립박물관이다. 설립자는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 박물관 기획에 참여시켰고, 3명의 젊은 청년 故장철수 선생, 박명도 선생, 신탁근 선생의 의견을 수렴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물을 수집한 이야기는 박물관계에 전설처럼 남아있다.

설립자는 누구보다 진심으로 우리 문화를 아끼고 사랑한 분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누구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상의 물건들을 국가가 아니라 한 개인이 사비를 털어 2만여 점을 수집하였으니 말이다. 이가 나간 소반, 흙이 묻어있는 호미, 한 땀 한 땀 엮어 쓰던 주루막 등 어찌 보면 사소한 물건이지만,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존하고 지켜야 할 것이고, 또 후대에도 물려줘야 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설립자의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면 오늘의 온양민속박물관은 없지 않았을까!

원래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땅의 기운이 따뜻해서 여기 사는 사람들이 따뜻해진 건지, 여하튼 온양 사람들은 참 따뜻하다. 시장에 가면 미나리 한 움큼이 봉지 위에 덤으로 쌓이고, 동네 식당에 가면 환한 미소로 안부를 물어주고, 박물관에 가면 할머니 무릎 베고 옛날이야기 듣듯 푸근하다. 최근에는 우한에서 돌아온 우리 교민들을 품어주었다.

올해 초부터 발생한 코로나19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전 세계가 전례 없는 비상상황을 보내고 있다. 다행이 우리나라는 질병관리본부의 체계적인 시스템과 국민들의 적극적인 예방 수칙 준수로 지금은 조금씩 소강상태를 보인다. 아직도 불안의 요소는 남아 있지만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고, 또 일상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경직돼서인지 개인도 사회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 같다. 다시 일상을 준비하는 이 시점, 옆의 동료를 바라보는 마음에 따뜻함이 필요할 것 같다. 다시 한 번 온溫양陽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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