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원장

화살촉 덩이
집수정 및 수구
산성 전경

[동양일보]우리나라는 ‘山城의 나라’라고 할 만큼 전국적으로 많은 산성들이 산재되어 있다.

충북지역은 한반도의 중부내륙이라는 지리적 환경에 의하여 삼국시대에는 처절했던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선조들이 생존을 위해 축성했던 입보용(入保用) 산성들이 지금은 충북과 한국을 대표하는 산성들로 유존되고 있다.

특히 충북지역의 산성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을 만큼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탁월성을 충분하게 인정받는 유적들이다.

충북지역의 여러 산성 중에서도 단양의 온달산성은 학술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우수한 축성기법과 남한강을 품은 경관으로 인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온달산성은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 67번지 일대에 위치한 테뫼식의 석축산성이다. 소백산맥에서 북쪽으로 분기한 해발 454.5m의 성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의 남한강과 동쪽의 남천이 자연적인 해자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입지 상 영월‧단양‧영주 순흥 방면의 육상교통로와 남한강의 수운 교통로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지점에 해당된다.

온달산성이라는 명칭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장군 온달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온달산성과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이에 따르면 성산고성은 둘레 1523척 높이 11척의 규모로, 안에 우물 하나가 있고 반쯤 무너졌다고 한다. <여지도서>에는 고구려왕의 사위였던 온달이 성산고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처음 기록되었는데, 이후 각종 기록에서 구전을 덧붙여 ‘온달축성 설’을 전승하였다.

그러다 1942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를 통해 처음으로 온달산성이라고 불리게 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온달산성이 위치한 단양에는 서기 158년 신라 아달라왕 5년에 죽령(竹嶺)이라는 길이 개척되는데, 이후 죽령은 고대사회에서 남북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다.

죽령이라는 명칭은 신라 화랑으로 유명했던 죽죽랑(竹竹郞)에 의해 개척되어 죽령이라고 했다는 설과,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이 이 일대라서 죽령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죽령인근에 위치한 보국사지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죽령휴게소로 옮겨진 기둥형의 석조물에서 대나무의 마디를 표현한 죽절문이 표현되어 있어 죽령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유물이라는 데서 주목된다.

대강면 용부원리에 소재한 보국사지에는 6세기 중엽에 조성된 거대한 석불입상이 있고, 최근의 발굴조사 성과에 의하면 이 절은 석실사원으로 창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충주의 계립령 아래에 미륵대원이라는 석실사원이 운영된 것과 같이 죽령아래에는 보국사라는 석실사원과 용부원이라는 국가 경영의 숙박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죽령의 영유권문제로 고구려와 신라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온달장군은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을 되찾지 않으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출전했다가 단양 영춘 지역인 을아단성(乙阿旦城)에서 전사하게 된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국토의 삼분의 일 이상을 빼앗긴다. 당시 경주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합천의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성주인 김품석 일가도 몰살당하는데 김품석은 당시 신라의 실권자이자 수상 이였던 김춘추의 사위였다.

이러한 위기에서 신라는 고육지책으로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적인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를 역사에서 김춘추의 청병외교 또는 모험외교 라고 한다. 이때 고구려의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원래의 고구려 땅인 죽령을 반환하지 않으면 귀국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억류하였다.

이렇듯 죽령은 온달의 출사표와 훗날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한 김춘추가 억류되는 구실이 되었을 만큼 양국에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 이였다.

신라의 對고구려 외교가 무산되자 결국 당나라 군대를 끌어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게 된다. 신라의 이러한 과정이 삼국통일이라는 원대한 계획에 의해 진행된 것인지? 이러한 행위가 진정한 민족의 통합? 이였는지는 한번 쯤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단양은 한강의 최상류 지역이다. 6세기 중엽 이후 한강의 상류를 확보한 신라는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진흥왕은 단양과 죽령을 공취한 후 이를 기념하고자 척경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된 ‘단양 신라적성비’(국보 제198호)이다.

온달산성에 대한 학술조사는 지금까지 총 3차례 이루어졌다. 먼저 1989년 지표조사를 통해 온달산성에 대한 대략적인 현황이 파악되었고, 2001년에는 북문지와‧치성‧수구 일대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루어짐으로써 각 시설의 구조 및 성격 등이 규명 되었다.

또한 2011년 서남 벽 및 남 치성 등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축조방식 및 남치성의 성격 등을 파악하였고, 2016년에는 집수지와 동쪽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를 토대로 현재 온달산성의 남벽‧북벽‧동벽 일부 구간 및 남문지‧북문지‧동문지 등이 복원 정비되어 있다.

온달산성의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긴 네모꼴에 가까운 부정형이다. 성벽이 정상부에서 북향하고 있는 완경사면을 타고 내려와 해발 390m의 지점까지 두르고 있어 남고북저의 형세를 보인다. 또한 남쪽의 정상부와 북벽 안쪽의 성내부에는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다.

성의 전체 둘레는 682m이며, 잔존하는 성벽은 최고 높이 9.8m에 달한다. 성벽은 납작한 석재를 이용하여 내외협축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축성 재료로는 성산의 기반암인 석회암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북벽 구간에서 사암 등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성벽의 기울기는 약 80~85˚를 이루고 있으며, 일부구간에서는 외벽 기저부에 덧대어진 기단보축성벽도 확인된다.

성문은 남문지‧동문지‧북문지 총 3개로, 모두 사다리를 이용하여 출입하는 다락문 형태의 현문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성벽을 외부로 돌출시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설치하는 치성이 북벽과 남벽에 각각 하나씩 축조되었다.

그리고 성의 가장 낮은 지점인 북벽에는 길쭉한 사다리꼴 형태의 입수구와 출수구가 잘 남아 있다. 온달산성은 온달 관련 전승과 화살촉 등의 고구려 계통 유물 및 성벽 축조방식으로 볼 때 고구려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단보축 및 ‘水口’의 형태와 굽다리접시 등의 출토유물로 볼 때 신라에 의해 수축되었거나 재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런 측면에서 온달산성은 남한강 수운과 소백산맥 교통로를 통제하는 요충지로서 고구려의 남진 및 신라의 북진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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