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원장

1978년 3월 적성비 발굴 모습
단양 신라적성비
단양 적성

[동양일보]적성비는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 3-1 적성(赤城)이라는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의 척경비이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때론 우연한 기회에 중요한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곤 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단국대학교박물관은 괴산군을 필두로 하여 충청북도 관내지역에 대한 학술조사를 연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1978년 1월 6일에는 단양군 하방리의 성재산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하였다.

단장 정영호 선생은 학생들이 흩어져 기와 편과 토기 편을 수습하고 있는 동안 자신의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고자 작은 돌 뿌리에 신발을 비비던 중에 돌에 뭔가 글자 같은 것이 보여 손으로 닦아 내면서 확인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신라의 고비(古碑)가 찾아지게 되었다.

이것이 진흥왕 때 조성된 단양 신라 적성비다. 비석과 같은 금석문은 그것이 지닌 내용도 중요하지만 비문에서 보이는 사건이나 행위가 언제? 어느 시점? 에서 발생되었는가 하는 절대연대의 확인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우연하게 발견되는 금석문들이 그 실체를 한꺼번에 마냥 드러내지 않아 연구자들을 애태우고 있으며, 때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경우도 종종 있어 왔다.

단양 적성비는 비문의 첫머리에 있어야 할 년간기가 결락된 채 발굴되어 1행의 문장이 월중왕교사(月中王敎事)로 시작되고 있다. 즉 OO년 O월 중 왕교사로 시작되어야 하는데 절대연대인 간기를 상실한 채로 발견되었다. 또한 적성비 발견 1년 뒤에 확인된 충주고구려비도 문장의 년간기 부분이 크게 마멸되어 오월중고려태왕(五月中高麗太王)으로 시작되고 있다.

단양적성비와 충주고구려비는 이러한 실태에서 우리에게 다가와 정확한 건비연대를 담보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하겠다. 한국고대사의 규명에 절대적 자료이며 독보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이 비석들은 발견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건비연대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한·중·일 삼국의 연구자들이 다방면으로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으나 결론을 도출하기가 쉽지만은 않다고 하겠다.

역사란 우연한 기회에 우리의 눈앞에 홀연히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자기모습을 다 들어 내지 않는 교훈을 준다고 하겠다.

적성비는 높이 93cm, 폭 107cm, 두께 25cm의 크기로,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로 내려올수록 좁고 얇아지는 모양이다. 자연석을 치석하여 사용하였으며, 윗부분은 잘려나갔으나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다. 비문은 화강암재의 자연석에 새겼는데, 얕게 음각했으나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 비면이 깨끗하고 자획은 비교적 생생하다.

전체 글자 수는 430자 정도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이며, 이 중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284자이다. 문장은 신라식 이두문과 한문이 섞여 있다. 서체는 중국 남조체의 원필로 해서체이다.

적성비의 건립연대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의 1행 상단부는 파괴되어 정확한 비의 건립연도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위 관등과 <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545~550년(진흥왕 6~11)또는 적성(단양)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시기인 551년 직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적성을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이후 신라관등 2등급인 이간 이사부를 비롯한 군주, 당주 등 군사 지휘관들이 회의를 열어 신라의 적성 점령에 공을 세운 현지인들에게 포상을 결정하고, 현지인이었던 야이차 등에게 포상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비에 보이는 이사부는 울릉도를 정벌했던 주인공으로 “독도는 우리 땅” 이라는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각인된 신라 장군 이사부를 말한다. 이 비문을 통해 노역체제와 재산 분배에 관한 법령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신라의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성비의 발견은 기존의 문헌자료에서 볼 수 없었던 내용이 다수 발견되어 신라사를 연구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대중등⋅군주⋅당주⋅사인 등의 관직명을 통해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및 촌락의 양상을 보다 깊이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국법⋅적성전사법⋅小子⋅小女⋅女子와 같은 용어를 통해 율령과 조세제도 등 신라 사회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이 비가 건립된 시점까지도 부족국가적 개념을 보이고 있다. 인명 앞에는 반드시 부명을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부명(部名)과 인명(人名), 관직명(官職名)을 질서정연하게 배열하는 방식의 문장을 취하고 있다.

4행 하단에 보이는 무력(武力)은 김유신의 조부이다. 일반적으로 김무력으로 인명을 표기하면 되는데 사탁부 무력지 아간지로 표기한 것으로 볼 때 이 비의 건립시기에는 개인의 성(性)보다는 신라 6부족체제의 출신부명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음이 보인다.

왕경출신 관료의 인명 아래에는 지혜로울 ‘智’자를, 관직명 아래에는 지탱할 ‘支’자로 존칭어를 붙이고 있어 무력지(武力智)하면 무력이 지혜롭다가 아닌 무력님으로 해석 되어야하는 고어체의 금석문이다.

단양 지역은 신라의 북방 공략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지역에 비를 건립한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고함을 다지고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회유흡수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단양 적성비의 발견은 신라사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학술적인 의미가 크며, 지금까지 알려진 4기의 진흥왕순수비 보다 앞선 척경비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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