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일선 청주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어일선 청주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동양일보]오늘 소개할 영화는 1993년 중국의 첸카이거 감독이 연출한 <패왕별희>이다. 패왕별희는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항우와 우희를 그리는 경극 작품이다. 영화는 파란만장했던 중국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고 그를 대변하는 인물 캐릭터들의 진실한 연기로 인해 보는 내내 묵직하고 쓸쓸하다. 관객들 가슴에 울림이 큰 영화이며, 1993년 제46회 칸느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당시는 중화권 영화가 한창 국제적으로 위상을 드높이던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 홍콩, 대만의 체카이거, 장이모우, 이안, 왕가위, 서극 감독 등의 활약으로 <영웅본색>같은 액션, <첨밀밀>같은 멜로, <음식남녀>같은 휴먼드라마, <홍등>같은 참 인생에 대한 가족사를 다룬 영화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가 중화권 영화의 감동에 빠져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이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새롭게 영화의 언어를 만들어가던 중화권 영화들이 서양에 소개되면서 중화권의 영화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도 했다. 세기말이라는 불안함과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휴먼을, 인간을 바탕으로 하는 그 당시 중화권 영화는 새로운 장르였다고 생각한다.

<패왕별희>는 경극을 하는 두 남자의 사랑과 질투, 그리고 경극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이야기가 주축이다. 어려서 북경 경극학교에 맡겨진 두지(장국영 분)와 시투(장풍의 분)는 노력 끝에 최고의 경극배우가 된다. 여자 역할을 맡았던 두지는 시투를 흠모하게 되는데, 시투에게 사랑하는 여인 주샨(공리 분)이 생기면서 방황을 하게 된다. 두지는 아편에 손을 대고, 시투는 주샨에게 빠져 살게 되면서, 두 남자는 중국의 역사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시작하게 된다. 남성성을 죽이고 여성적으로 자라야했던 두지와 패왕의 역할을 맡은 자로서 호방하게 자란 시투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투의 선택은 유곽의 여인인 주샨이었다. 주샨은 두지와는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당찬 여자였던 것이다. 두지는 지고지순하다. 시투가 자신이 아닌 쥬산을 선택했다는 것에 비통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지는 시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시투를 위해 패왕의 칼을 바치고 일본군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서슴치 않고 심지어는 남성으로서의 순결을 굴욕적으로 잃게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남자이지만 여인의 삶을 사는 두지는 자신의 패왕인 시투를 가진 주샨을 몹시도 질투하기에 이른다. 아이러니 하지만 이런 가혹한 운명에 놓인 두지와 주샨은 서로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보면 한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게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주샨과의 결혼으로 시투가 극단을 떠나게 되자, 두지는 아편을 시작하고 만다. 아편중독으로 다 죽어가는 두지를 안아주는 것도 주샨이었다. “엄마. 추워요. 강이 다 얼어버릴 거 같아요.”라고 흐느끼는 두지를 안아주는 주샨은 아이를 유산한 경험이 있었다. 어쩌면 그 회환으로 두지를 아이처럼 안아주면서 공감을 하였는지 모른다. 두지도 어릴 적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이 따스함은 두지에게 있어서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는 듯 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국민당 정부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그들의 예술과 사랑과 집착은 이어지는 듯 했지만,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고 모택동에 의해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두지와 시투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자기비판이 이어지는 과정 중에 시투는 두지가 과거에 저질렀던 사실을 폭로한다. 그러자 두지는 주샨이 창녀라고 공격하고 시투는 잘못된 결혼을 했다고 말한다. 홍위군들과 많은 군중 앞에서 혼란으로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시투는 자신은 주샨을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준 이들은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한 남자 시투, 남자이지만 여성의 삶을 살며 시투를 사랑한 두지, 시투가 선택한 여인 주샨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렇게 시대 속으로 운명처럼 사라져 버린다.

<패왕별희>는 개인의 삶과 중국의 현대사를 함께 다룬 영화이다. 중국의 전통 경극을 환호하던 시대부터 경극을 구식이라고 없애고자 했던 문화혁명기까지, 중국 현대사의 중요하고 굵직한 사건들을 두 사람의 감정과 경극이라는 시대적 삶에 빗대어 보여준다. 시대에 적응해 살려고 하는 시투와 시대에 상관없이 자신이 적응된 삶 속에서 사랑에 애타하는 외로운 두지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해 문화는 정치 속에 눌려버리고, 자신의 정체성도 잃어버린 중국 현대사의 진정성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중, 마지막 공연연습에서. "나는 비구니. 사부에게 머리를 깎여.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 계집도 아닌데." 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던 두지의 처음과 같았던 마지막 말을 시투는 "틀렸어" 라고 웃으며 부정하게 되자, 두지는 마치 경극 속의 우희처럼 더 이상은 살아갈 수 없다는 듯, 현실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된다. 어쩌면 끝까지 두지는 대답없는 일방적인 사랑을 했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통했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어 시작되지 않은 사랑처럼 말이다. 그렇게 결국 시투도 혼자 남게 되면서, 사랑하는 모두를 잃고 만다. “일생을 같이 하기로 했잖아. 1분 1초라도 함께하지 않으면, 그건 평생이 아니야“ 라는 그들의 진심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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