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희 진천문인협회 회장

박경희 진천문인협회 회장

[동양일보]노르스름한 감 꽃 위에 금빛 미소를 머금은 초여름의 햇살이 잔잔히 부서지는 날!

생의 길목에서 인연의 고리로 묶인 아름다운 사람, 내가 단발머리 소녀 시절 그녀는 내 앞에 나타났다. 시댁에 들어와 산다는 건, 어쩌면 낯선 땅에 처음 부임한 선생님이거나 선교사 같은 게 아닐까? 그녀는 남편을 빼고도 여섯 식구의 시선을 늘 의식하며 자기가 뽑은 심지에 책임을 지고자 노심초사했다. 밤낮없는 집안일에 밥을 해도 그냥 밥만 하는가? 중간에 밥 위에 호박이나 가지를 얹기도 하고 밀가루 옷을 입힌 고추를 얹기도 한다. 어느 땐 새우젓국을 푼 계란을 얹어 별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또 타이밍을 잘 맞추지 않으면 밥이 설거나, 밥 위에 얹은 것들이 설거나 하였다. 정말 그런 것들이 내게는 예술처럼 보였다. 그저 잘 얻은 둘째며느리, 잘 들어온 올케, 제수로 만족하며 그렇게 나이 먹어가고 있었다.

새벽이면 논밭으로 나가시던 어머니를 대신해 내게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고 여고를 졸업하던 해 공무원이 되어 초임발령을 받을 때 함께 기뻐해주던 박꽃 같던 여인.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낮에 있었던 민원인과의 마찰로 울분을 토해내면 “나랏돈 받는다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느냐고, 그저 참으라”고 달래주던 여인. 세월은 흘러 나도 같은 직장에서 그이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가까운 곳에 신접살림을 차리다 보니 연년생으로 낳은 우리 아이들까지 돌봐주는 외숙모가 되었다. 종일 엄마 없이 보내는 어린것들 데려다 먹을 것 챙겨주고, 비오면 아이들 학교로 우산도 가져다주고, 늘 부족한 모성으로서의 죄책감에 콧날이 찡하던 내게 안식을 주곤 했던 여인. 두부와 북어를 굽고 삼계탕을 제대로 해 먹여 어느 것 하나 맛없는 것이 없었다던 우리 아이들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외가댁이란 말보다 더 따사롭고 정겨운 어휘도 드물 것이다. 평화스럽고 인정스럽기 그지없는 감미로운 유년시절을 보내게 해준 그 여인이 있는 내 아이들의 외가는 별세계였고, 꿈의 공간이었으리. 언제나 감성의 탄력을 키워주고 인격의 토양을 풍요하게 하는 유년기의 꿈나라가 아니었을까.

처음 우리 집에 올 때만 해도 얼굴도 예쁜데다 큰 키와 날씬한 종아리까지 갖추었던 올곧게 쭉 뻗은 몸매의 그녀는 어디로 가고, 이제 검은 머리는 빠지고 흰머리는 늘어나고, 눈은 침침해지고, 주름은 늘어가면서 살은 또 왜 찌는지… “화무십일홍” 누구나 비껴갈 수 없는 진리 아닌가?

어느덧 이젠 나도 정년퇴직을 하고 60넘은 여자가 되어 공도 아닌 것이 공인척 하는 운동회 때 모두들 던져 복바가지 터트리는 오재미가 되었다.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것도 없고, 몸서리치게 맛있어 행복한 음식도 없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감기라도 걸려 쓰디쓴 침이 고이는 날엔 염치없게도 그녀에게 집밥 좀 먹고 싶다고 전화를 한다. 갓 지은 밥에 봄이면 구수한 향기의 쑥국이며 코끝이 찡해오는 달래 무침, 홑잎나물, 냉잇국 원추리나물의 향기로 어느 진미에 못지않게 입맛을 살려주고 나를 즐겁게 해 주는 여인.

금년 봄엔 돌아가신 어머니가 백세 되는 해라고 산소 앞에다 온갖 산해진미로 생신상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우리 형제를 모두 불러 모아준 여인.

아아! 비록 주름살이 물결처럼 드리워지고 검버섯이 돋아나고 마른 수풀같이 엉클어진 흰머리를 이고 있는 저 여인일지라도 내 눈엔 더할 나위 없이 거룩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날 명색이 작가라고 내게 어머니를 향한 편지를 써와서 읽으라던 여인.

“엄마! 산소를 돌보며 고향을 지키고 있는 작은 오빠와 올케가 6년 전에도 아버지 백세 생신제를 준비해서 지냈는데, 그때만 해도 건강하던 작은올케가 지금은 70이 넘어 아픈 데가 너무 많아요. 그런데도 이번에 아픈 다리를 끌며 하루는 손수 다식을 박고 약과를 만들고, 하루는 강정을 만들고 또 하루는 식혜와 전을 직접 만드는 모습에 생노병사의 짠함을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이렇게 성치 않은 몸으로 정성을 다해 차려드린 생신상을 기쁘게 받아주시고, 천상에서나마 우리 8남매와 자손들 모두가 무탈하게 잘 견디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엄마의 크신 공덕을 베풀어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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