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ESI 교장

[동양일보] 1. 두 손과 두 발을 반듯하게 땅에 대고 엎드린다. 2. 왼발이나 오른 발을 약10cm 정도 앞으로 당긴다. 이때, 무릎은 가슴 아래에 오게 한다. 3. 앞으로 당긴 발의 무릎을 바닥에서 떼고 바로 그 순간 내민 발의 발바닥으로 바닥을 밟는다. 4. 그 발에 힘을 주어 일어남과 동시에 땅에 댄 팔에 힘을 준다. 5. 일어서게 되는 순간 다른 발을 끌어 당겨 두 발로 선다.

어느 나라에서 나이가 어려서 기어 다니는 아이들을 조기교육을 통해 일어나게 할 요량으로 위와 같은 학습과정을 만들었다. 이를 시행해 보니 나이 별로 격차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학년과 반을 만들었다. 거기에 교사를 배치하고 아이들이 일어나는 과정을 외우는지 시험을 보고 이를 외운 아이에게는 상을 주는 것이 그 나라 교육자들의 오랜 동안 연구의 결과로 일어난 일이었다.

단 하나 이상한 것은 일어나는 과정을 달달 외우는 고득점 아이도 아직 일어나서 걷지는 못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런 교육을 전혀 하지 않는 이웃 나라의 아이들은 모두가 쉽게 걷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마어마한 교육과정 속에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을 앞에 두고도 자신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그 무엇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확신을 가진 아이들을 키워내는 그 나라가 어디일까?

나이가 같은 학생으로 반을 구성해야 한다거나 점수로 아이들을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 등은 공부의 정의를 반드시 왜곡시키는 것들이다. 거기다가 형식적 교과과정을 만들고 각 교과과정을 세분한 뒤 이들을 시간으로 나누어서 수행할 임무로 과정화하면 공부는 그저 공부가 아닌 것들만으로 형성된 괴이한 미로의 방이 된다. 이를 이행할 주체가 국가가 되었을 때 그 국가의 국민들은 이 미로에서 헤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런데 국민의 수가 충분히 커지면 그 상태에서 사람들은 경제와 정치 시스템을 형성한다. 그 미로에서 기이한 의미로 삶을 해석하는 경우에도 그 의미대로 성공한 사람이 있고 망한 사람이 생기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과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도 생긴다. 이것이 사회적 동물로써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는 사고의 습관이며 행동의 양태이다.

공부라는 것은 겉모습을 가지지 않는다.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형태가 공부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공부가 겉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공부의 개념 자체를 본질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가 국가적 단위로 생기면 그것은 그 것 자체에서 정치성과 경제성을 가진 체제의 주요 내용으로써 위치를 가진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추상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공부는 형태에 해당하는 것들 예를 들면, 학년과 반의 구성, 진도, 시험, 점수, 진학, 등이다.

그래서 진도를 미리 나가서 시험에서 더 나은 점수를 얻으면 진학과 취직에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리고 공부와는 반대되는 것을 공부의 상도(常道)로 여기게 한다. 소설을 많이 읽는 것이 좋다는 말은 소설의 내용의 흐름에 감성의 배를 띄워 그 흐름이 폭풍을 일으킬 때 그와 같은 위험과 어려움을 겪고 그 흐름이 잔잔할 때 물의 너울거림마다 갈라져 내려앉는 빛 조각이 주는 한없는 평안과 사랑을 경험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남보다 소설을 더 많이 읽기 위해 속독법을 익히고 감성없이 읽은 책의 양을 자랑한다. 배울 것만 쏙 빼 놓아서 효율적일 것 같은 이러한 방법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인기를 얻는다.

'인생은 헛되다.'라는 명제는 깨달음의 내용일 때 가치를 가진 철학의 내용이 된다. '인생은 헛되다.'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살자는 주장이 있다면 적어도 후자는 전자보다 사회의 체계를 구성하는 원리가 될 가능성이 적어야 한다. 그것을 아는 것은 공부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교육의 본질을 주장하고 그 시각에서 교육개혁을 외치는 용기가 이 사회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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