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사람의 위(胃)는 목구멍으로부터 한자 여섯 치를 내려가면 심창 골과 배꼽 중간에 각 네 치에 뻗쳐있으며, 위의 길이는 한자 여섯 치요, ……. 무병한 사람이 하루 한 번 대변하면 쏟아지는 것이 두 되 반이요, 그 때문에 일체를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배설하면 두 이레 만에, 서 말 닷 되 저장된 것들이 모두 쏟아져 물과 음식이 동이나 죽습니다. 이것이 위(胃)의 모습입니다.”

배우 전광렬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반위(위암)에 대해 절절하게 쏟아내는 명대사다. 2000년 MBC 드라마 ‘허준’의 한 장면이다. 대한민국 사극 역사상 64.8%라는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현재까지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드라마다. 20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허준’하면 바로 그때의 감동이 느껴지는 진득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한마디로 허준이라는 인물이 걸어온 굴곡진 삶에서 느끼는 연민과 충군애민(忠君愛民)하는 따뜻한 인술에 공감하고, 동의보감이 지닌 시대적 가치가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허준(許浚, 1539~1615)은 어떤 인물인가.

반상(班常)이 엄격하던 시대에 양천(陽川)허씨 서얼(庶孼) 출신으로 태어났지만, 타고난 총명함으로 1574년(선조 7) 의과(醫科)에 급제하여 이듬해 내의원의 의관(醫官)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어의(御醫)로 의주까지 왕을 호종(扈從)하고 돌아와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 1608년 돌연 선조가 승하하자 어의(御醫)로서 책임을 물어 한때 파직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유배 중에도 허준은 의서(醫書) 집필에 몰두하여 1610년 8월 6일, 410년 전 오늘, 드디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다. 선조의 명을 받아 시작한 의학서 저술작업이 16년간의 연구 끝에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전통한의학을 집대성한 의학 백과사전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어 내의원에서는 1613년 25권 25책을 목활자로 간행하기에 이르렀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동의보감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됐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격을 맞추기 위해 거꾸로 보물로 등록돼 있던 동의보감을 승격시켜 2015년 6월 22일, 국보 제319-1호, 2호, 3호로 지정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 각각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돼 있고, 서울 강서구에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허준박물관(許浚博物館)이 역시 선생의 이름을 딴 허준로(路) 87번지에 있다.

허준의 사상과 동의보감이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추앙받는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규정하면 ‘예방’과 ‘양생(養生)’이다. 그 바탕에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의 고충을 덜어주려는 위국애민(爲國愛民)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17세기에 벌써 국가가 공공 의료를 책임질 것을 선포하며, 세계 최초로 예방의학을 강조한 의학서로써 의학계는 물론 사회문화 전반에 중요한 메시지를 안겨주고 있다.

요즘 코로나 19시대에 비추어 봐도 본받아야 할 역사적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핵심은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사는 ‘양생(養生)’을 기둥으로 삼아 치료에 앞서 예방에 힘쓰라는 것이다. 인간의 질병이 신체적 요인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현대에 들어서서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지구환경과 예방의학의 중요성을 훨씬 앞서서 간파하고 있었던 셈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내린 건강의 정의, 즉 ‘신체적 측면과 아울러 정신적·사회적으로도 좋은 상태라야 진정으로 건강한 것’이라는 개념과도 딱 들어맞는다. 당시로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처방이자

대단한 혜안(慧眼)이다.

전 세계 코로나 감염자가 1850만 명을 넘어서고 사망자가 70만 명에 달하는 펜데믹 상황에서 17세기,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건강한 삶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준 ‘동의보감’의 지혜를 빌려보자.

명의 허준 선생이라면 아마도 이런 처방을 내려주시지 않을까.

“정(精), 기(氣), 신(神)을 잘 보하여 면역력을 키우고, 3밀(밀집, 밀폐, 밀접)을 피하되, 방역수칙을 잘 지키며 순리대로 즐겁게 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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