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희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

이남희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

[동양일보]올해부터 9월 1일은 법정기념일인 ‘여권통문의 날’이다. 여성도 문명개화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고,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1898년 북촌 사는 부인들이 주도해서 발표한 날이다. 며칠 뒤 황성신문, 독립신문 등에 기사가 실렸다. 열흘 만에 삼백여 명의 여성들이 지지를 표명했으며, 덕분에 첫 여성단체인 찬양회가 조직되고, 최초로 한국 여성이 주도한 순성여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다.

애초에 ‘여학교설시통문’이라고 불린 여권통문의 존재는 1970년대 박용옥 교수를 필두로, 여성사학자들에 의해 차츰 알려졌다. 윤정란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신한은행 백년관이 자리한 서울 중구 삼각동 117번지가 당시 모임이 열린 장소다. 모임 참여자인 이시선의 집이자 홍문동사립소학교 터였던 이곳에는 작년에 ‘여권통문 기념 표석’이 설치됐다. 선언이 나온 지 12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기념할 장소와 기념일을 갖게 되었으니 감개무량하다.

우리나라 근대 여성인권선언이 19세기에 이미 나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참 신기하고도 좋았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나 시몬느 드 보봐르가 아니라 우리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통해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해 듣다니 정겹고 든든했다. 올해는 기념식을 성대히 치를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북 여성계 각 분야에서 마음을 모아 축하하고, 전시와 릴레이 기고 등으로 공동의 기억을 만드는 중이다.

충북여성재단은 ‘충북여성의 삶’ 사진전을 숲속갤러리에서 개최하면서, 주제를 여권통문에 맞춰 교육, 직업, 정치참여로 잡았다. 도와 각 시·군, 충북사진기자회, 여성단체와 개인의 협조를 얻어 194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사진을 모았다. 대농방직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교차시킨 육성준, 서편제 가락을 화면으로 재현한 구연길, 충북이 배출한 걸출한 사진작가 김운기 선생님의 작품에는 충북여성의 진솔한 생활상이 담겨있다. 1950년대 화양계곡에 모인 여성지도자, 담배잎 건조장에서 나오는 여성농민, 올갱이를 손질하는 서울식당 사장님 등 모두 한 시대를 열심히 살아낸 주인공이다. 보노라면 여권통문 속 구절대로 ‘그 학문과 지식이 사나이와 못지아니한 고로 권리도 일반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라고 절로 속삭이게 된다. 전시는 충북미래여성플라자에서 연말까지 이어진다.

여성의 지위는 해당 사회,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찬양회 역시 국운이 풍전등화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독립협회와 함께 만민공동회에 동참하고, 체포도 불사하는 의지를 보였다. 그 와중에 부유한 부인들이 비단옷을 입고 와서 돈 없는 회원을 차별한다는 식의 악의적인 비방이 떠돌자 임원진이 신문사에 정정 보도를 요청한 사건도 있었다.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그때도 있었나보다. 한편 찬양회는 개화파 남성지식인과 연대하거나 조력을 받았다. 영국 자유당 개혁파 존 스튜어트 밀처럼 찬양회와 독립협회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 남성 동지들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그 분들이 여성의 삶이 바뀌어야 남성의 삶도 바뀐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여권통문의 요구사항은 성취되었을까? 여학교 설립 요청에 대해 고종이 흔쾌히 화답하여 회원들이 만세를 외쳤으나 막상 예산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결국 두 해 후, 국가재정 부족을 이유로 여학교 칙령안은 부결되었다. 찬양회가 민간자금을 모아 우선 개교한 순성여학교는 5년을 버티다 문을 닫았다. 학교운영을 맡은 김양현당은 안타깝게도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 후 기독교계가 아닌, 고종 황실이 지원하는 여학교로 진명과 명신이 1906년에야 개교했다. 더 중요한 일을 위해서 여성 교육 정도는 유보할 수 있다는 시각은 지금 우리에게도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여권통문의 날’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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