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주무관

[동양일보]오래된 느티나무는 한 마을의 상징이자, 역사가 된다. 포석 조명희(1894~1938) 선생이 태어난 곳인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포석 문학을 연구하고 있는 강찬모 문학박사에게 이 느티나무에 깃들어 있는 의미는 특별하다. 동양일보는 강 박사가 보내온 ‘포석(抱石) 느티나무’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강 박사는 현재 진천군 ‘포석 조명희문학관’에 근무하고 있다. <편집자>



●느티나무가 쓰는 자기소개서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데없다’는 말은 산천의 유구함과 달리, 토란잎의 이슬 같은 인간 삶의 덧없음을 얘기할 때 회자되는 말이다. 세월 앞에 어찌 천하의 인걸이라고 범부와 다를 수 있을까. 사실 요즘 같은 시대는 산천도 시시로 변한다. 자고 나면 어제와 다른 환경을 목도하는 게 일상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하지만 이제 먼 얘기가 되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하며 격세지감(隔世之感)의 현실을 산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이 되니 세월의 무상함을 알 것 같다. 아직도 인간적으로 미숙한 흠결이 헤아릴 수 없지만 일 년 사계가 가히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음을 온 몸으로 체현한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몸살 속에서 ‘나무’는 그 변화의 시간들을 묵묵히 견인하며 기록한다. 나무는 인간과 닮았다. 바위처럼 영구하지 않고 인간과 더불어 나이를 먹으며 성장하고 쇄한다. 단지 인간보다 오래 살아 시간의 켜를 증언할 뿐이다. 나무는 고전 영웅호걸들의 삶에서도 ‘좌표’ 역할을 했다. 유비가 스승(노식)의 추천서를 찢어버린 일도 ‘고목’을 보며 깨달은 깊은 상념 때문이며 유년시절에 천자가 되겠다고 호언했던 장소도 ‘뽕나무’ 가지 위에서였다.

특히 ‘느티나무’는 예부터 ‘당산(堂山)나무’라 불리며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한 나무로 ‘제상(祭床)’까지 받는 귀하신 몸이다. 또 ‘정자(亭子)나무’로 불리기도 하는데 쉼터인 정자와 한자(漢字)까지 같은 것으로 보아 대개 정자 옆에 느티나무를 심어 휴식과 운치를 고려한 듯하다. 필자의 고향 입새에도 우람한 나무가 있는데 정자나무라고 불렀다. 그 나무가 느티나무였다는 것을 안 건 고향을 떠난 후였다. 시골에서 각종 식물들을 기억하며 호명할 때는 계통 분류의 학명(學名)보다 그 식물이 생활 속에서 인간과 맺는 현실적 정서적 관계에 의해 불리는 경향이 있다.

느티나무는 나무의 ‘황제’답게 귀족의 혈통을 자랑하지만 거만하지 않고 친화력이 뛰어난 나무이다. 잘 생긴 얼굴과 훤칠한 키에 두 팔을 몇 배로 연결해도 모자랄 아름드리 몸통을 자랑한다. 도대체 어느 한 구석 빠지거나 모자란 게 없다. 이런 걸 보면 신은 공평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어찌 신의 가호(加護)가 없을까. 그 뜻은 완벽에 가까운 이상형을 보여줌으로써 동경(憧憬)의 눈으로 하여금 ‘우상’을 꿈꾸게 하는 것일 게다. 그가 벌린 양팔은 두 손이 키워낸 작은 손가락들이 수없이 가지를 친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눈과 더위를 막아주고 식혀주는 ‘느티나무 영토’이다. 마음이 쉬어가고 싶을 때 찾아가면 잔잔한 위로가 되어주는 작은 ‘카페’가 되며 사람이 그리울 때 찾아가면 왁자지껄한 동네 ‘사랑방’이 된다. 그래서 느티나무가 있는 동네는 ‘느티나무 나라’가 된다.

이런 나라에 살며 영토를 지키는 내가 잘 아는 느티나무가 있다. 이제 그 느티나무는 내게 평범한 나무가 아니라 애인이며 친구이고 스승이며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올해 ‘춘추(春秋)’가 ‘236년’이나 됐다. 백 년을 두 번이나 지나 세 번째를 향하고 있으니 춘추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가 태어난 날을 손꼽아 샘을 해보니 ‘1784년’이 아닌가. 이쯤 되면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236년이라고 했을 때 막연하게 느꼈던 그의 생의 구체적인 조각들이 생생한 사실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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