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주무관

강찬모   문학평론가/문학박사
강찬모 문학평론가/문학박사

 

[동양일보]●역사의 서기(書記)가 되다

그가 태어난 전후의 시기는 왕조(조선)의 마지막 불꽃이 화려하게 피어오르던 대왕 정조(1752-1800)의 르네상스가 현란한 황금의 시기였다. 그는 일단 호시절에 태어났으니 사주가 좋은 셈이지만 한 생이 어찌 무풍이며 양지만 있으랴.

그 후 그는 비운이 아비 사도세자를 향한 군주(정조)의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풍문으로 들었을 것이며, ‘천주교 박해(신유1801~병인1866)’를 피해 ‘배티골’(진천 백곡)로 숨어든 순교자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뿜어내는 빛나는 영성을 보았을 것이며, 백성의 나라를 꿈꾸던 ‘성군(聖君)’의 급사로 만조백관(滿朝百官)의 통한의 곡소리를 또 풍문으로 들었을 것이며, 안으로 썩을 대로 썩어 더 이상 회생 불가한 열성조(列聖祖)의 황혼을 직감했을 것이며, 그러던 어느 날 벽안(碧眼)의 코쟁이들이 쏘아대는 생전 처음 듣는 천둥 같은 대포 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며, 결국 섬나라 왜놈이라고 얕잡아 보던 그들에게 종묘사직이 문을 닫히는 망극의 비보를 흘러 흘러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망하기 16년 전, 그러니까 ‘1894년’ 이 ‘마을(벽암리)’에 태어난 예사롭지 않은 한 아이의 탯줄이 끊어지는 장면을 직접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아이 이름은 ‘조명희’, 호는 ‘포석(抱石)’이다. 벽암리(碧岩里)는 ‘벽오(碧梧)’와 ‘수암(秀岩)’이 줄어서 유래가 된 마을인데 벽오든 수암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을에 ‘푸른 이끼가 낀 큰 바위’와 ‘모양이 빼어난 바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구전에 의하면 벽암리의 터 자체가 화강암을 지반으로 한 땅이기 때문에 낱개의 아름다운 바위는 물론, 너른 바위가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형국이었다고 한다.

이런 풍경이라면 바위가 마을의 지명이 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느티나무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의 터줏대감이었던 게다. 조명희의 호(號)인 포석도 이런 마을의 유래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호가 특별하게 거창한 것은 아니다. 자기가 태어난 고장의 이름을 호로 짓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퇴계(退溪)와 율곡(栗谷)도 탄생과 성장의 지명을 자신의 호로 정했다. 태어나고 자란 땅이 주는 영험한 정기야 말로 한 인간의 생애를 결정하는 근원적 힘일 테니 말이다. 포석 조명희는 벽암리의 ‘큰 바위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푸른(아름다운) 바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푸른 바위가 써 내려간 마을의 역사를 느티나무가 어어 받아 기록하는 마을의 ‘서기(書記)’가 되었다. 자칫 단절될 뻔한 마을의 역사가 느티나무에 의해 맥을 잇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계승(繼承)’의 과정 속에 포석의 삶과 문학이 존재한다.

1784년에 태어난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친한 친구는 ‘바람’과 ‘새’이다. 236년 동안 대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평생의 지기인 바람과 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람과 새가 내왕 할 수 있는 곳곳의 소식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발 대신 하늘이 그에게 준 선물은 십방(十方)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열린 귀’이다. 지용은 “제약을 통하지 못한 비약은 정신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움직일 수 없다는 숙명은 나무에게 제약으로 작용하지만 그 제약 때문에 오히려 높고 깊은 정신의 세계로 비약할 수 있었다. 나무에게 들을 수 있는 열린 귀는 이러한 제약이 주는 정신의 선물인 셈이다.

그러나 바람과 새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가 있었으니 바로 고향인 벽암리에서 생긴 일들이다.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포석의 출생의 순간과 집집 세간살이의 규모 등 마을의 대소사를 빠짐없이 모두 알 수 있었던 것도 한마을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포석이 태어난 해(1894)에 이미 111년 수령(樹齡)의 백수(白壽)를 넘어섰다. 그가 관장(管掌)하며 기록한 일기는 역사가 되고 예언서가 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거수(老巨樹)가 신목(神木)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자연의 섭리로 그는 마을에서 한 생명이 태어난 비롯됨과 그 생명의 미래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예사롭지 않게 태어나 거역할 수 없는 한 인간의 비극적 삶의 운명 앞에 회한으로 밤을 새운 날들이 또 얼마였을까. 역사란 이렇게 인간의 영광보다는 불행과 슬픔을 먹고 조각된 시간의 성(城)은 아닐는지….

이렇듯 벽암리의 느티나무는 포석과의 인연을 생각할 때 더욱 특별한 나무가 아닐 수 없다.

청운에 꿈을 안고 출타와 귀향을 반복할 때도 느티나무는 묵묵히 포석을 맞고 배웅했을 것이다.

아마 망명(1928) 전 마지막으로 고향에 들러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 왔을 때도 느티나무는 저 혼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귀향이 돌아 올 수 없는 마지막 귀향이며 결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슬픈 이향이라는 것을.

같은 달을 보며 그리움의 대상과 상념이 다르듯 사람들은 하나의 대상을 놓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것을 자기화한다. 그래서 내게 벽암리의 느티나무는 ‘포석 느티나무’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