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김태창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11월 7일 목요일

오전 9시 45분, 1회 장수철학국제회의장이 마련된 시즈오카현 현청으로 이동.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음. 오전 11시 30분, 시즈오카현청 제공 도시락+녹차로 중식.

오후 1시, 1회 장수철학국제회의 키도히로시 ‘인구문제로서의 장수사회’, 야규마코토 ‘장수에 대한 한일 수용 비교’, 원혜영 ‘장수사회에서의 젠더’. 10분간 휴식.

마쓰모토료죠 ‘중남미문명에 있어서의 생과 사’ 호사카쥰지 ‘인도문명에 있어서 나이 듦의 지혜에서 배움’, 나가마키히로치카 ‘종교인류학에서 보는 생과 사’, 그리고 이어진 토론.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발제자들의 발제내용도 잘 정리되어 있고, 질의응답도 간결하면서도 요령 있게 잘 전개되었음. 앞으로 시간문제를 잘 생각해볼 필요를 느꼈다.

원혜영씨의 발표도 좋았고, 그 다음 세션에서 사회도 보았는데 잘해냈다. 한일 양쪽 참가자들 사이에 평이 좋았다. 다행이다.

저녁에는 조촐한 친목 모임이 있었다.



11월 8일 금요일

오전 9시 40분, 시즈오카현청 1회 장수철학국제회의 이틀째 모임 오전회의(오전 10시~11시 50분), 오오하시켄지 ‘인간이 갖는 약함의 의미와 가치’, 김영미 ‘아름답게 나이 듦’, 동시영 ‘열린 시의 창작과 읽음, 몰입과 즐김’. 낮 12시 현청 제공 도시락으로 중식.

오후 모임(오후 1~3시) 김용환 ‘장수철학’, 김봉진 ‘유교적 노년관’, 그리고 나의 기념강연(오후 3시 30분)으로 이어졌고, 오후 5시 30분, 식당으로 이동하여 고등어구이 정식으로 석찬을 즐겼다.

기념강연에서는 요코야마다이칸(橫山大觀, 1868~1958, 향년 89세)과 구마가이모리카즈(熊谷守一, 1880~1977, 향년 97세), 두 화가의 생애와 그림과 사상, 그리고 센노리큐(千利久)의 와비차에 얽힌 이야기를 하면서 후지산(富士山)과 차문화와 장수철학의 상관연동을 강조하였다.

후지산을 1500점이나 그렸다는 다이칸의 말년의 작품명은 ‘不二’였고, 그것은 ‘富士’와 ‘不二’가 일본 발음이 같다는 데 붙인 것이기도 하지만, 말년에는 둘로 갈라졌던 상태에서 마침내 둘이 아닌 온전히 하나인 상태로 변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大觀다움’을 보인 것이다.



11월 9일 토요일

새벽 2시 30분 기상 양치, 2시 45분 온수(+레몬즙) 두 컵.

시즈오카현과 일본의 비교문명학회 공동주최 1회 장수철학국제회의는 보은 때보다 축소된 형태로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내용면에서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하라다켄이찌 비교문명학회 회장과 아마모토교시 미래공창신문 사장의 정성과 능력이 여러모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조건과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준 성과였다. 야규마코토씨의 헌신적인 협력도 큰 힘이 되었다.

한국측 참가자들을 대표한 김용환 교수도 다른 때보다 더 정성을 들인 준비가 성과를 내는 데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원혜영씨와 김영미씨도 한국여성의 특성을 살려서 발제에서도 남다른 주목을 끌 수 있었고, 동시영 시인의 독특한 프레젠테이션도 일본측 참가자들에게 잘 이해될 수 있도록 성의껏 설명을 했다.

황진수 교수는 동시영 시인의 남편구실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노인복지 전문가로서의 예리한 문제제기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을 훌륭하게 했다.

11월 10일 일요일

낮 12시, 김태정 교수와 김석철 강사 부자와 야마모토교시 미래공창신문사 사장,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 만나 점심을 같이하면서 활발한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한일간 그리고 세대간 관계 단절문제를 거론했다. 정부간은 물론 민간 사이에서도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많은 대화가 이루어져 왔었다.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회복‧ 진작‧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양 다원 다층의 대화활동이 적극적으로 끈기 있게 계속될 필요가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적인 기여가 널리 공인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장수란 틀림없는 축복이요,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귀중한 경험축적의 기회다.

노년철학 또는 장수철학을 잘 다듬어서 다음 세대에게 귀중한 유산으로 남겨주게 되기를 기원하며 살아간다.



11월 11일 월요일

오전 9시 30분, 지금 한국은 매일 몹시 춥다고 하면서 믿음의 겨울옷 두 벌을 유니크로에서 사다달라는 딸 혜원이의 부탁이 왔다. 그래서 낮 12시에 점심을 마치자마자 요도바시카메라에 있는 유니크로에 갔으나 휴점이어서, 다이마루백화점의 유니크로에 가서 바지‧ 내의‧웃옷을 두 벌씩 짝을 지어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큐백화점의 지하 1층을 지나 우메다한큐 전차역으로 돌아오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게 된다. 양쪽 손에 무거운 짐을 가진 채로 올라탔다. 반쯤 올라갔을 때 몸의 균형이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 균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신을 잃고 아래로 굴러 떨어졌던 모양이다.

의식을 찾았을 때는 구급차에 실려 가는 도중이고, 뇌 쪽의 균열이 심하고 여기저기 타박상을 입은 상태여서 위급하기 때문에 우선 스미토모병원 응급실로 이송하려는데 어떠냐고 물어서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너무 고통이 심해서 말할 힘도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머리 상처를 봉합하고 지혈제를 쓰고, 가슴 쪽에 받침대를 대어 우선 뇌신경외과 827호실로 긴급 입원했다.

오후 8시 30분에야 기초적인 필요검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담당의사가 알려주었다. 아주 다행히도 뇌에나 내장에나 심장에서 출혈이 멈추고 확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치료의 가닥이 잡혔다는 것이다. 강력한 진통제 덕에 가까스로 잠을 잤다.



11월 12일 화요일

오전 2시 20분, 눈뜸. 의식이 몽롱한 채로 잠을 잔 것 같은데, 일어나려고 하니까 온몸의 격통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다. 그래도 간호사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나 앉았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누워있거나 앉아 있거나) 간신이 견딜 수 있는데, 움직이기만 하면(누워있다가 일어나려 하든가 일어나 앉거나 누우려고 하면)고통이 극심하다.

오전 7시, 병원에서 첫 아침 식사. 밥, 감자된장국, 야채모듬, 삶은 달걀인데 식욕이 없어서 반쯤 먹고 물렸다. 오전 10시 40분, 머리, 가슴 CT검사. 낮 12시 점심 먹는 둥 마는 둥.

오후 1시 30분 담당의사는 “뇌 쪽은 처리가 잘 되어서 전혀 문제가 없는데, 갈비뼈 두 개가 골절이 되어 정상을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그래서 고통도 장기대응을 필요로 한다. 그래도 그만하기가 대행”이라고 했다.

낮 12시 40분 야마모토교시 사장 내방. 오후 5시 50분, 히가시모토쥰꼬씨 내방. 오후 7시, 아내와 딸과 손자가 급히 달려왔다. 얼마 있다가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다.

진통제를 먹고 일찍 잠을 청했다. 의식이 몽롱하다. 잠을 자는지 깨어있는지 잘 모르겠다.



11월 13일 수요일

오후 3시, 교토대학 오구라기조 교수가 내방해 내년 3월 20~22일 교토대학에서 노년철학 포럼을, 5월 15~16일 조명희 포럼을 열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오구라 교수의 생각에는 원광대학에서 한다는 노년철학 포럼도 교토대학에서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박맹수 총장의 생각도 알아보아야 하니까, 일단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상의를 해보겠다고 했다. 그분은 학내외의 일들이 많아서 시간내기가 대단히 어려운데다, 사모님의 병환도 있어서 시간조정이 큰일인 것 같다.

오늘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식욕이 없어 먹는 둥 마는 둥했다. 매일 수액을 계속해서 맞고 있어 기본적 수분공급은 보장되어 있고 신체적 활동은 최소한으로 국한되어 있어서 그런지, 뭐가 먹고 싶다든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전연 들지 않는다.

담당의사는 예외 없이 매일 와서 현황설명을 해준다. 모든 병증은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11월 14일 목요일

새벽 3시 20분 정기검진으로 눈뜸. 그 동안도 정기검진을 계속해왔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검진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혈압‧ 체온‧ 산소충실도를 체크. 모두 정상이란다. 아픔이 어떠냐고 물어서 진통제 덕으로 견딜 만하다고 했다.

간호사가 말했다. 천만다행이라는 말이 내 경우에 적중한다는 것이다. 에스컬레이터 중간쯤에서 밑바닥까지 상당한 거리라서, 전락으로 뇌와 전신이 입은 타박상이 대단히 컸고 출혈도 심했는데, 누군가가 재빨리 알려주어서 구급차의 이송이 가능했고, 응급치료가 적절하게 이루어졌으며, 필요한 검사를 통해서 병증 데이터가 취합되었기 때문에 예상외로 빨리 호전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재빨리 통보해준 사람의 공이 컸다는 것이다. 뇌출혈이 외상으로 끝났기 때문에 뇌내병증을 일으키지 않아서 복잡한 합병증을 병발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지도 만난 일도 없는 사람들의 은덕으로 살아가는구나.



11월 15일 금요일

새벽 3시 20분 정기검진으로 눈뜸. 간호사의 힘을 빌려 일어나 앉았다. 아프겠지만 매사가 호전되어가고 있으니 며칠만 입을 악물고 견디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일어나 걷고 싶다고 했다. 아직은 절대 안정이 필요한 때이니 앉아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담당의사의 엄명이라는 것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간호사들이 수시로 내 방안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그 동안의 검사들과 강력한 진통제 때문인지 솔직히 정신이 몽롱할 때가 많다. 현실과 비현실이 마구 뒤섞인다. 비몽사몽간을 헤매는 경우가 자꾸 있다. 그래서 극심한 고통이 완화되는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불안하다. 이러다 정신이상을 일으키지 않을까?

그러나 간호사는 단언한다. 절대 그런 일은 안 일어난다고. 담당의사가 수시로 세세한 병증 변동을 모니터하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내 몸에 세 군데에 모니터링시스템을 부착해 놓은 의미를 이제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완벽한 관리하에 보호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간호사들도 수시로 드나들며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월 16일 토요일

오전 11시, 야규마코토씨 내방. 11월 23일에 박맹수 총장과 조성환 박사가 동경에 있는 동양(東洋)대학에서 강연을 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몸의 고통이 극심하고 음식도 거의 먹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데, X선‧ 방사선을 사용하는 검사를 몇 차례 하고 나니, 메스껍고 구역질도 나는 아주 괴로운 시간이 더디게 지나간다.

오전 11시 55분, 딸 혜원이와 손자가 함께 병원에 왔다가, 딸과 손자는 오늘 저녁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뇌쪽의 상처는 급속히 잘 치료되어 가는데, 골절로 인한 고통은 진통제로 완화시키고 있을 뿐,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제대로 정상 회복될 것이라고 의사도 간호사도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내게는 배변이라는 문제가 있다. 이 병증들이 모두 정상화되기까지 견디어내야 한다. 나의 인내는 어디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11월 17일 일요일

자고 있으나 깨어 있으나 정신이 몽롱하고 매사가 뚜렷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현실과 비현실이 마구 뒤섞이는 것 같은 느낌이 이상하게 나를 휩싸고 있다. 강한 진통제 때문인 듯하다.

일요일은 휴식하는 날이다. 그러나 나는 휴식할 수 없다. 밀려오는 고통과 싸워야 하니까, 이겨내야 하니까. 이러는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이 명료하게 된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픔을 견디어가는 것, 죽으면 아프다는 것도 아픔을 견딘다는 것도 필요 없게 된다. 그러니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견디는 것, 그것이 살아있음을 가장 확실하게 실증하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고통은 견디어낼 동안은 아주 긴 시간이다. 그러나 견디고 나면 별안간의 짧은 순간처럼 느껴진다. 진통제로 억제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아프니, 만약 진통제마저 쓰지 않는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마도 죽기를 원하게 되겠지. 그래서 죽음이 최후의 해결책이라는 말도 있는 거겠지.



11월 18일 월요일

오후 1시 20분, 센리긴란(千里金蘭)대학 간호학부 간호학과 3학년 여학생이 간호학 실습으로 간호실천능력을 체득하기 위하여, 나의 간호를 받게 해달라는 지도교수(隍智子)와 병원측의 공동명의로 동의요청서를 가지고 왔기에 승낙 서명하였다.

오카모토안주(岡本杏珠)라는 이름의 21세 학생이다. 언뜻 보기에도 자상하고 속깊은 성격인 것 같은 인상이었다. 어디까지나 전문 간호사의 간호 원조이며, 승낙한 후에도 조건 없이 거부‧ 중단할 수 있으며, 실습과정에서 습득한 정보는 간호직자의 수비의무에 따라 엄중하게 보호하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유의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실습학생에 대해서 알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언제나 실습지도자나 지도교원에게 문의해달라는 점도 첨가되어 있다.

오후 2시 30분, 담당의사가 와서 오늘부터는 될수록 몸을 움직이도록 하고(반드시 간호사를 불러 간호를 받으면서) 진통제도 적절하게 조절해서 자력으로 고통관리를 해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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