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동양일보]‘역사란 무엇인가.’ E.H 카의 명저를 떠올리지 않아도 역사를 해석하며 정의하는 기준은 저마다의 상황과 관점에 따라 다르다. 보통 사람들에게 역사는 사전적인 거창한 정의를 떠나 시간의 기록으로 인식된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 속에 있는 삶은 그리고 그 시간을 영위하는 인간은 누구나 역사의 자장 안에 존재한다, 이것은 비단 인간만이 국한된 게 아니라 인간과 관계된 모든 유무형의 사물과 대상을 포괄한다. 그러나 그 시간을 경험한다고 하여 누구나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기록’이 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데 기록의 조건은 ‘특별함’이다. 의미가 있는 특별함일 때 기록돼 전승된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조선의 어느 왕 때 광화문 네거리에서 노상 방뇨한 갑돌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갑돌이는 역사가 되지 못했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행위가 당시에는 특별한 것 없는 대중들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임금이 노상 방뇨를 했다면 어땠을까. 당연히 기록돼 역사가 됐을 것이다. 왜? 지엄한 임금의 기이함과 통념을 깬 파격이 특별한 까닭이다. 이렇게 역사는 기록이 될 때 시작되며 강한 생명력으로 항구성을 갖는다.

진천에 이런 역사가 서린 ‘나무’가 있다. 나무의 이름은 ‘느티나무’이며 수령은 ‘237’년을 자랑한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언제부터인가 ‘포석 느티나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포석 느티나무라고 부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무는 ‘역사’가 됐다. 보호수로서 피상적으로 관리되고 있던 상태에서 새롭게 역사로 거듭났다.

필자는 작년(2020. 9. 8) 본 신문에 3회에 걸쳐 포석 조명희 생가와 지척에 있는 느티나무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대외에 환기한 바 있다. 포석이 가고 없는 지금 느티나무는 포석의 삶을 명징하게 증언하는 유일한 대상이다. 포석이 태어난 해인 1894년에 이미 111년이 된 수령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필자는 포석 느티나무가 가진 두 가지 특별함을 더하고자 한다.

첫째, 느티나무가 포석이 1924년에 출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발표 개인 창작 시집인 ‘봄 잔디밭 위’에 ‘표지 그림’에 그려진 실제 나무라는 것이다. 필자는 작년 연재 이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온몸에 전율이 일어 한동안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봄 잔디밭 위에’는 3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중 1부의 제목이 ‘봄 잔디밭 위에’이다. 포석은 1부 제목을 표제로 사용한 후 느티나무가 있는 고향 풍경을 소묘했다. 책의 표제를 선택하는 일은 해당 책의 전체적 성격을 특정하는 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그와 관련된 표지 그림이야말로 이러한 의미를 심화시켜주며 작품의 사실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더구나 ‘봄 잔디밭 위에’가 수록된 부는 포석이 동경 유학을 정리한 후 고향에 돌아와 쓴 시로서 고향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그의 손때가 묻은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 아닌가. 필자가 아는 한 한국 근현대문학가 중 자신의 고향 풍경을 표지로 그린 작가는 포석이 처음이다. 더구나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나라를 강탈당한 시대, 고향이 상실된 야만의 시대가 아닌가. 그런 시대에 고향을 표지 그림으로 전면에 배치한 것은 그 자체로 무언의 저항을 뜻하며 느티나무는 지금도 살아 그 시대의 역사와 포석이 걸어간 선구자의 형극의 삶을 묵묵히 증언한다.

두 번째로 놀라운 일이 있었다. 1991년(11.12) 러시아에 있는 포석의 자손(선아 . 선인 . 블라디미르)들의 고국 방문이다. 포석은 망명 후 러시아에서 3남매를 두었다. 3남매가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의 땅 대한민국, 아버지의 고향, ‘진천(벽암)’을 방문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3남매의 고국 방문이 격한 감동으로 밀려오는 것은 1928년 포석이 망명 후 64년, 사후 54년 만의 ‘귀향이기 때문이다. 포석의 전기적 삶은 1938년 5월 11일 밤 11시에 멈췄지만, 영과 육은 자손들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져 반세기가 훌쩍 지나 그렇게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밟은 것이다. “나의 고향이 저기 저 흰 구름 너머이면/새의 나래 빌려 가련마는”(‘나의 고향이’)하며 오매불망한 고향 땅을.

이때 자손들을 마중한 것도 느티나무였으며 아마도 버선발을 하고 뛰쳐나갔으리라. 처음으로 만나는 이복형제와 일가친척 등 피붙이와 회한의 상봉을 하고 눈물을 흘렸던 곳도 느티나무 아래였다. 지금도 이때 기념 촬영을 한 사진이 어제처럼 선명하게 그날을 이야기한다. 사실 포석은 1928년 망명 전 마지막 고향 방문을 한 일이 있다. 이때도 느티나무와 작별을 고했을 것이고 느티나무는 포석과의 작별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모습이란 것도 직감하며 속으로 애끓는 울음을 삭였을 것이다.

이런 느티나무가, 포석 느티나무가 지금 아프다. 한국 문학사에서 일 획을 그은, 아니 한국 근현대사에서 문학을 초월하여 위대한 역사가 된 포석, 그를 상징하는 느티나무가 매우 아프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비통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묻는다. 저 포석 느티나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누군가는 반드시 답해야 한다. 그것이 미완으로 남은 포석의 완전한 귀향(유해)을 손짓하는 노란 손수건이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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