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택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문위원

파산자가 찾아낸 ‘형적’ 없는 섬, 다름아닌 조선영토 독도
나카이 요자부로, 독도이전에도 전라· 충청해안 답사

 

동양일보는 22일 월요일자 1면에 “‘독도는 일본 땅’ 근거 문서 효력 없다”는 내용의 기사를 최초 보도했다. 이 보도는 위택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문위원이 ‘량코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의 문서상 결함을 발견하고 동양일보에 제보한 내용을 토대로 했다. 위 위원은 후속으로 문서에 등장하는 나카이 요자부로라는 일본인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만들게 된 배경을 담은 원고를 보내왔다. 편집자

일본 내무성 장관 요시카와 아키마사는 37秘乙 제337호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을 1905년 1월 10일 내각총리 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제출하였다.

“<메이지 38년(1905년) 1월 10일 무인도(無人島) 소속(所屬)에 관한 건>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섬에서 서북으로 85리 떨어진 곳에 있는 무인도는 타국에서 이것을 점령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형적(形跡)이 없고 1년 전인 메이지 36년(1903년) 우리나라 사람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라는 자가 어사(漁舍)를 짓고 근로자를 옮겨와서 엽구(獵具)를 갖추어서 강치잡이에 착수하여 이번에 영토편입및 대여를 출원하게 된바 이에 소속 및 섬 이름을 확정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섬을 다케시마(竹島)라 명명하고 지금부터 시마네현(島根懸)소속 오키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한다. 이를 각의에 요청한다.”

1906년 5월20일 시마네현 초등학교 교장인 오쿠하라 헤키운(奥原碧雲)이 쓴 . 시마네현이 파견한 독도조사단의 일원으로 1906년 독도를 다녀왔고 동행했던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로부터 그의 고심참담(苦心慘憺)을 듣고 기록한 내용이다.
1906년 5월20일 시마네현 초등학교 교장인 오쿠하라 헤키운(奥原碧雲)이 쓴 . 시마네현이 파견한 독도조사단의 일원으로 1906년 독도를 다녀왔고 동행했던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로부터 그의 고심참담(苦心慘憺)을 듣고 기록한 내용이다.

 

같은 해 1월 28일 각의는 통과됐고 강원도 울릉도 소속 독도는 일본 시마네현 오키지청 다케시마(竹島)가 됐다.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는 부지런한 기업인이었다. 1864년 일본 시마네현 출신인 그는 일찍이 학업[漢學]을 포기하고 어업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럼에도 그는 손대는 사업마다 망하였다. 나카이가 독도에 대한 임대청원을 하기까지의 과정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1906년 5월20일 집필 당시 시마네현 야즈카군(八束郡) 아이카무라(秋鹿村)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오쿠하라 헤키운(奥原碧雲)이 쓴 <다케시마경영자나카이요자부로씨입지전(竹島経営者中井養三郎氏立志伝)>(2007년 3월 발간 시마네현 竹島問題硏究會 자료, 이하 입지전)에는 그가 독도에서 사업을 하기까지 겪었던 어려운 상황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그의 역경은 대략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남태평양 오가사와라(小笠原)제도에서 사업을 모색하기도 하고 호주행을 기도하다가 사기꾼을 만나 전재산 날리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잠수기 어업을 했으나 실패한다. 이어 조선의 전라 충청·해안을 답사해 봤지만 별무소득이었다.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삼채취사업을 벌였고 일본의 돗토리, 오키, 이와미 연해에서도 해삼채취사업을 벌였으나 실패로 끝난다. 1898년 시마네현 오키도청의 보조금을 받아 건착망시험사업을 착수하고 북명사(北溟社)를 조직하여 활발히 어업에 종사하려 했지만 사원들의 배척을 받아 많은 부채를 지고 크게 곤란한 상태에 빠지게 됐다. 그의 나이 34세때였다.”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 몰리자 그는 정부의 힘을 빌려 사업을 하기로 한다. 당시 조선에서 어업활동을 하면 ‘대박’이 난다는 현지 답사물들이 나돌았다. <조선통어사정(朝鮮通漁事情)>( 前대일본수산회 수산전습소장 關澤明淸·同이사 竹中邦香 지음, 1893년 발간),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葛生修吉 지음, 1903년 黑龍會 발간) 등이 그런 근거있는 저작물이었다.

<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에는 강원도 울릉도(鬱陵島) 양코도(당시 독도를 한일 모두 ‘양코(ヤンコ )’라고 불렀음)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울릉도에서 동남방 약 30리, 우리 오키국에서 거의 같은 거리의 바다 가운데 있다며 일개 무인도다. 밝은 날씨일 경우 울릉도 산봉우리 높은 곳에서 이를 바라볼 수 있다. 한인 및 일본인은 이 섬을 양코라고 부른다. 길이는 거의 10여정, 연안의 굴절이 매우 심하며 어선을 정박시키거나 풍랑을 피하는 데 좋다. 하지만 장작이나 음료수를 얻는 것은 매우 곤란하면 지상에서 수척 뚫는다 해도 물을 얻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이 섬에는 해마가 매우 많이 서식하며 근해에는 전복, 해삼, 우뭇가사리 등이 풍부하며 수년전 야마구치현에서 잠수기선 전망이 있다고 해서 출어한 적이 있지만 잠수했을 때 무수히 많은 해마군에 방해를 받고 음료수 부족 때문에 만족스럽게 영업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생각건대 당시 계절은 공교롭게도 5, 6월로 해마의 산기(産期)에 해당돼 특히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또 부근에 오징어잡이에 좋은 어살이 있고 몇 년 지난후 5 ,6월이 되면 오이타현 오징어잡이배가 뒤이어 출어한 적도 있고 작년 봄 이곳에서 귀항한 어부에게 물어보니 출어는 아직 2, 3회에 불과하므로 충분히 좋은 결실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어도 계절마다 상응한 어획이 있고 종래 경험상 망대의 상태, 오징어류 서식 상태 등을 살펴보건대 앞으로 상당히 유망한 어장이 될 것임에는 의심할 것도 없다고 한다. 이 섬은 아마 영업자를 위해서는 아직 충분히 탐험할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한해통어지침(韓海通漁指針)> 123~124쪽.
계속

 

 
위택환씨
위택환씨

 

위택환 위원은...

서울 출신. 1986년 건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경향신문, 사운연구소 등을 거쳐 문화체육관광부해외문화홍보원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1999년 사운 이종학(1927∼2002) 선생이 세운 사운연구소에 근무하며 독도, 이순신 등 영토주권문제를 연구했고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해양정책자료집(전 4권) 1910년 한국강점자료집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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