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택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문위원

청주 삼일공원에 세워진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청주 삼일공원에 세워진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죽음을 각오하고 3·1운동에 혼신 기울여
포용력, 자금력, 추진력 등이 전국적 시위 가능케 해

[동양일보]의암(義庵) 손병희(孫炳熙, 1861~1922)는 충북 청주시 북이면 금암리 대주촌(大周村)에서 태어났다. 1882년 동학에 입문한 이래 1894년 호서지방 중심의 북접(北接) 사령관인 통령(統領)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기수로서 활약하기에 이른다.

혁명이 좌절된 후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 ~ 1898)은 손병희를 북접 대도주(大道主)에 임명했다. 이로써 손병희는 입도 15년 만에 동학의 3세 교주가 되었다.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그는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추적을 피해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한다. 1905년 12월 1일자로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고 이듬해 1월 5일 귀국했다.

그는 1919년 1월 도쿄유학생의 2.8독립선언계획, 신한청년당 및 기독교계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독립선언 방식의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독립에 대한 열망을 알리고, 일본의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의 열국의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의견서와 청원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나아가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이윽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등이 완성되자 선생은 직접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검토가 이루어진 후,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1919년 2월 27일,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에 날인하였고 2월 28일 자신의 집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민족대표를 불러 협의하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거나 배포하면 소동이 일어날까 우려한 것이다. 그리고는 2월 28일 그는 천도교 교주 자리를 대도주 박인호(朴寅浩, 1855~1940)에게 넘겨주었다. 이를 두고 “손병희 스스로가 죽음을 각오하고 3.1운동에 임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거사일인 3월 1일, 선생은 태화관에 모인 28인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자진 체포되었다. 그가 점화한 3.1운동은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인이 살고 있는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19년 3월10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300만명의 국민과 3000여개 교회가 참여하는 독립협회는 서울과 평양 등 여러 도시에서 독립을 선언했으며,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를 파리평화회의에 보내 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전했다.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충북 괴산의 만세운동도 손병희와 무관치 않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3.1운동사’에 따르면 1910년 한일병합 당시 자결한 금산군수 홍범식의 장남 홍명희는 32살 되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청원 출신 의병장 한봉수와 함께 국장에 조문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를 만나 괴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독립선언서를 챙겨 고향으로 돌아온다. 충북 최초의 3.1 만세운동은 시골 오지 괴산에서 시작됐다.

위택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문위원
위택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문위원

 

수천 명이 몰린 괴산장날 홍명희 등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자 괴산장터에는 삽시간에 600여명 몰려들었다. 경찰은 홍명희 등 주도자 18명을 체포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1500여명까지 불어난 시위대는 괴산경찰서로 몰려가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이튿날 새벽 2시까지 시위를 벌였다. 이어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 4월 중순까지 괴산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시골 오지까지 염두에 두고 꼼꼼히 챙겼던 손병희의 세심함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3.1운동 과정에서 손병희의 공로 가운데 하나는 자금조달이다. 김규식의 파리 파견 경비 10만원 가운데 3만원, 거사 때 기독교 측의 경비 5천원은 전부 천도교에서 부담했다. 그의 포용력과 자금력, 그리고 추진력 등이 3.1독립만세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만세는 일제의 무단 탄압으로 좌절된다. 그는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출혈로 가출옥했고 그의 자택인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를 했으나 1922년 5월 19일 생을 마감하였다. 1980년 청주 삼일공원에 그를 포함해 충북지역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00년에는 그의 생가터에 ‘의암기념관’이 건립됐다. 충북 괴산출신으로 손병희의 평생 동지였던 권동진(權東鎭, 1861~1947)은 한 잡지 기고문에서 “손 의암(義菴)은 천도교의 태양이자 우리의 구주(救主)였다”며 “실로 근세에 조선이 가진 거인(巨人) 중 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위택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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