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욧카이치대학(四日市大学) 명예교수

[동양일보]들어가며

최근 일본에서는 ‘종활(終活)’을 둘러싼 서적이 많이 출판되고 있다. ‘종활’이란 일반적으로 ‘고령자가 죽기 전에 신변정리를 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내가 아는 80이 넘은 연구자도 나에게 종활의 일환으로 고가의 <일본사상대계(日本思想大系)>(岩波書店) 전집과 <우에키 에모리 저작집(植木枝盛著作集)>전집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내가 죽으면 장례식을 부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진종문도(眞宗門徒)인데, 내가 정토진종(淨土眞宗) 주지였기 때문에(지금은 아들이 맡고 있음) 그렇게 부탁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먼저 죽으면 어쩔 수 없지만 죽지 않는다면 부탁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는 내 친구 중에서 나와 같은 종파에 속하는 주지도 동석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장례식에 협력한다는데 동의해 주었다.

지인의 이러한 행동도 ‘종활’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자리는 ‘기분이 우울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술을 주고 받으면서 신자유주의가 석권하는 일본을 어떻게 변혁시킬 것인가의 이야기로 한껏 고조되었다.

우리는 혼자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혼자서 성장할 수는 없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타자의 신세를 지고 있다. 현재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고독사(孤獨死)’는 본인이 아니라 사회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오늘날에 회자되는 ‘종활론’은 사회나 타자와는 아무런 유대가 없는 자기폐쇄적인 신변정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본인에게 기쁨도 없고 타자에게도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변정리 활동에 열을 올리는 종활은, 오오하시씨가 <노년철학하기>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쿠로사와 아키라(黒沢明) 감독의 영화 ‘살다(生きる)’(1952년)에서 시청의 원로과장의 삶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평소에 타성으로 일을 수행하던 원로 과장은 어느 날 말기암 선고를 받고 절망의 늪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갈등을 거쳐 다시 일어나고, ‘주민들로부터 강한 요청을 받으면서 각 부서를 전전하면서 불가능해졌던 공원건설’에 전력으로 힘써서, 이권에 따라 움직이는 야쿠자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협력을 얻어 마침내 공원을 완성시킨다. 공원이 완성된 날 밤, 눈이 펑펑 내리는 공원에서 홀로 그네에 탄 채 만족한 표정으로 조용히 숨을 거둔다.

이 원로과장은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몸으로 지역주민의 요망인 공원건설을 실현한다는 종활(終活)을 한 것이다. 그 바탕에 있는 것은 타자와의 유대이다. 타자와의 유대에 대한 자각이 그에게 인간성을 되살아나게 했기 때문에 만족해 하면서 숨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삶과 죽음은 일체화되고 있다.

남아프리카에는 “사람은 타자를 통해서 인간이 된다”는 격언이 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타자가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완성자로서 이 세계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로과장의 활동은 실로 사람들의 유대 속에서 인간이 되고자 한 활동이어서 감동적인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종활’ 관련 책의 대부분은 타자와의 관계성을 끊는 시점에서 쓰고 있다. 현대 일본은 고령자(65세 이상)가 전체 인구의 21%를 넘는 초고령사회로, 2007년에 이런 사회에 돌입했다고 한다. ‘종활’을 논하려면 오늘날의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고령자에게 걸맞은 인간회복의 실현을 지향하는 세계관이나 철학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응한 것이 오하시 겐지씨의 <노년철학하기>이다.



1. 현대 일본의 고령자문제와 ‘기업사회’가 가져온 전후(戰後) 일본의 현실

(1) 고령자의 현실

일본인의 평균수명은 2017년 통계에 의하면 남성 81.09세, 여성 87.26세인데, 고령자가 되어서 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과거로부터의 지연과 혈연이 붕괴되고, 격차사회의 진행에 따른 빈곤층의 확대’ 속에서 생활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연사(無緣死), 고독사(孤獨死)의 중심에 놓이는 것이 고령자이다.

고령자는 무연사, 고독사와 직결되는 경제적 파탄으로도 불안에 떤다. 연금생활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붕괴될 수 있다. ‘건강이 악화된 고령자가 자택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살던 곳에서 쫒겨나 병원이나 노인시설을 전전하면서 죽을 곳을 찾아 표류하는 ‘노인표류사회’가 현실의 일본의 모습‘(19쪽)이기도 하다.

또한 노인의 대부분은 정년 후의 삶의 방식을 모르는 상태에서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자택에 틀어박혀 있다. 일본에서는 2014년에 65세 이상의 인구가 3천만명을 넘었다. 이 무렵부터 ’고령자가 느끼는 여러 가지 불안을 배경으로, 죽음과 대면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총괄하기 위한 준비활동인 ‘종활’이 사회적 붐이 되고 있다.‘(31쪽)

이러한 형태의 종활에 대해서 오하시씨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준비=종활은 주위에 폐를 끼치지 않는 배려나 확립된 개인의 자각 혹은 현대사회에서 유행하는 ‘자기책임’ 등과 같은 사회적·시대적 요청에 상응하는 일견 바람직한 경향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고령자에게 있어서는 정신에너지를 빼앗고 삶의 의욕을 저하시키는 것이 아닐까? 죽음에 다가가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죽음의 준비 같은 것은 하루 이틀에 잽싸게 끝내고, 남은 많은 날들을 보다 잘 살기 위해서 삶의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죽음을 분리시키고 죽음을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34쪽)



(2)‘기업사회’가 낳은 인간의 고립화

그럼 이와 같은 노후의 생활고를 낳은 사회적 구조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오하시씨에 의하면, ‘경제를 우선시하여 이익으로 치달은 경제체제의 운영-유지에 경도된’ 삐뚤어진 구조다.

전후(戰後) 일본은 ‘어디까지나 회사가 중심인 ‘회사사회’, ‘기업사회’를 형성‘해 옴으로써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고, ‘기업의 이익에 헌신하며’ ‘회사가 생활의 모든 것’이라고 하는 회사인간이 양산되어 왔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불황 속에서의 구조조정에 의한 불안감이나 성과주의・장시간 노동이나 서비스 잔업 등에 의해 노동자의 전 인생과 전 인격이 노동에 얽매이고 있다. 그 결과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회사사회 속에서 회사정년을 맞은 사람들은 ‘버려진’ 인간이 되고, 쉽게 ‘사회적 사자(死者)’가 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오하시씨는 나카가와 케이치로(中川敬一郎)·유이 쓰네히코(由井常彦) 공편 <경영철학ㆍ경영이념(쇼와편昭和編)>(1970년)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상적 관심사는 기업과 종업원과의 관계이고, 그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기업은 종업원에 대한 복리시설을 확대함으로써 종업원의 생활을 24시간 기업 안에 가둬 두려 한다. (그것을 통해서) 근로계급의 회사의식은 점점 강해지고 시민의식은 점점 약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자유기업체제의 축인 시민적 사회질서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어, 현대의 대기업은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다고 할 수 있다.”(72-73쪽)



회사에 대한 과잉의존이 지역사회에서의 시민들 사이의 관계만들기를 저해하고, 일본인을 시민으로 자립시키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정년 후의 인간이 살아야 할 상호관계성을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가 실질적으로 거의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폐해를 초래한 회사주의는 실은 좋지 않은 개인주의가 기반이 되고 있다. 그 연원은 오하시씨에 의하면 ‘무사문화(武士文化)’와 ‘선불교문화’에 있다.

“무사(武士)는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봉급은 번주(藩主)가 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협력을 바라거나 할 필요도 없다. 일가(一家)는 일가로서 타인과는 무관하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무사에게 있어서는 독립독단(獨立獨斷)이 생활의 기본자세이다. 일본인의 개인주의는 무사문화나 문사와 공존관계에 있던 선불교 등의 종교적 개인주의 하에 양성되어 왔다.”(77쪽)

일본이 메이지시기에 서구화가 가능했던 것은 이와 같은 개인주의와도 관계되어 있다. 일본에서의 개인주의에서는 ‘무사문화에 의해 서로가 냉담하고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연대감은 희박하고, 좀처럼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며, 고독하기 때문에 ‘과도한 군중심리’가 나와서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경향이 회사사회를 만들어 내는 토양이 되고 있다. 그 결과 회사정년에 의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면, 유일한 가치기준의 기반인 회사로부터 추방됨으로써 관계가 단절되어 사회적 사자(死者)가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그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기본시점을 “얼마나 지위가 올라갔나?” “얼마나 벌었나?”라는 ‘평가가치·업적가치의 존중’보다도 지역과의 유대와“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는 존재가치로 바꾸는 것이다. 그 가능성은 동아시아문화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2.동물적 문명에서 식물적 문명으로

일본, 한국, 중국의 동아시아에는 예로부터 유교·불교·도교와 같은 종교적·문화적 공통점이 존재하고 있고, 자연과의 일체감, 가족이나 공동체의 유대를 중시하는 전통이 공유되어 왔다. 그런데 19세기 중엽 이래로 동아시아가 서양 근대를 세계에서 가장 과도하게 수용하고 추종해 온 탓에 ‘근대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서양 근대는 오늘날 글로벌한 신자유주의의 확산 속에서 격차와 빈곤을 낳고, 지방을 붕괴시키며 인간적인 유대를 소멸시키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과잉신앙의 폐해, 인구급감・격차사회・소자고령화(少子高齢化)・노후파산(老後破産)・경쟁사회・자살의 다발 등등, 한중일 삼국은 서양 근대의 최대 수혜자인 동시에 최악의 피해자・희생자이다.”(103쪽)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가족이나 지역사회 등의 유대의 결여·분단 등’에 무감각한 강한 개인만이 성공자가 된다. 그 원천은 서양 근대에 있고, “강한 개인이 이끌어온 근대의 극적인 물질적 진보와 발전은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를 가져왔다. … 한편 그것은 강한 개인에게 깊은 고독감을 가져온다고 하는 역설을 초래한 것이다.”(106쪽)

이러한 사회에서는 ‘빈곤층, 비정규직 젊은이들, 그리고 고독에 괴로워하는 노인들’은 약한 인간으로 내버려지고, 강한 개인과 약한 개인의 이분화가 진행된다.

오하시씨는 이러한 현실을 바꾸는 시점을 ‘강한 개인·자아의 강함’에 대한 반성과 약한 개인에 대한 자각적 회귀에서 찾는다. 그것은 ‘근대 유럽적 정신의 전형으로, 자기 부정을 모르는 비대화된 자의식과 고독 속에서 자기를 심화시키고 고양시키고 확대시키려고 하는 정신’을 축으로 한 개인에서 ‘자연과의 일체적 관계 속에서 타자와 연대하고 함께 의지하며 사는 존재’로서의 개인으로 ‘자각적으로 깨달아서 약한 자기를 사는 것’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의식의 전환을 매개로 하여 타자(가족ㆍ공동체ㆍ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주위에 의존하는 자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강함을 지니는 존재로 귀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하시씨는 강한 개인과 약한 개인의 관계를 동물과 식물에 대비시킨다. 서양 근대로 상징되는 동물적 문명은 약육강식·우승열패, 신자유주의·경제지상주의를 축으로 하는 타자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문명으로,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다른 한편 식물로 상징되는 식물적 문명은 ‘하늘을 우러르고 땅에 뿌리를 두는 수직적 삶, 중력에 몸을 맡기는 정적인 지성, 우주와 공명(共鳴)하는 삶의 방식’으로, 타자와의 상호의존성과 공존을 축으로 하는 문명이다.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욕망에 사로잡힌 채 지상을 기어다니는 동물적 삶의 방식, 오로지 서로 잡아먹고 서로 약탈하는 상식상탈(相食相奪)의 동물적 문명”과 동시에, 직립 자세로 상징되는“체축(體軸)을 대지에 수직으로 하고서 하늘을 향해 몸을 쭉 펴는 ‘식물의 삶’도 동시에 지닌 존재이다. 현대에 필요한 것은 동물적 문명에서 식물적 문명으로의 전환이다.

‘우주의 생(生)의 리듬에 조용히 몸을 맡긴 채’ ‘뇌의 폭주를 허용하지 않고 우주와 한 몸이 된 상태에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식물적 문명은 쿠마자와 반잔(熊沢蕃山, 1619~1691)이나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1703-1762)의 사상, 또는 동아시아의 전통사상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존재방식은 경험이 풍부한 고령자에게 걸맞다고 할 수 있다.



3. 노년철학의 의의

“항상 하늘을 우러르고 대지에 서 있으며, 우주의 생(生)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산다”는 것은 동아시아문화에서는 우주와 자연의 창조(造化)에 참여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우주의 ‘조화에 참여하고 이것을 도움과 동시에, 조화의 지배와 그 필연에 살고’, ‘보다 나은 미래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것’이 인간 미래의 삶의 방식이다.

“어려서 배우고 장성해서 행동하고 늙어서 가르친다”고 한 쿠마자와 반잔의 말은 “삶의 방식이나 말을 통해 비인간적 현실을 변혁하는 여정을 보여주라”고 하는 고령자에 대한 요청일 것이다. 이와 같은 조화참여 모델은 쿠마자와 반잔, 안도 쇼에키에게 있어서는 농업이다.

“농업이란 천지자연의 활동에 인간이 힘을 빌려주어 벼를 기르는 동물과 식물의 공명장(共鳴場)으로 존재한다. 하늘과 대지와 인간이 함께 힘을 합쳐 수행하는 공동작업으로, 인간의 조화참여의 기본모델이 되는 것이다.”(162쪽)

이와 같이 천지조화에 참여하는 주체자는 성인으로 여겨지는데, 성인이란 ‘호오(好惡)가 없는 마음=인(仁)을 자각한 사람’으로, 현대적으로는 ‘민중’이라고 할 수 있다. 노인이 해야 할 일은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기본시점에 서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오늘날의 격차사회를 인간적 사회에서 어떻게 전환시켜 나갈 것인가를 가르치는 일이다.

오하시씨는 노년기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쿠마자와 반잔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은 동시에 오하시 자신이 제기하는 노년철학이기도 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늙어감에 따라, 혹은 죽음의 문턱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좋은 내일을 전망하고,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 행복한 미래,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정열을 결코 잃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실천에 종사하지 못하고, 내적인 정신의 차원에 머물렀다고 해도 정신의 방향성만은 항상 그것을 유지해야 한다.”(169쪽)

오하시씨가 서술하고 있듯이, “이것은 동시에 나이든 사람이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가르치는 철학이 된다.”

노인은 체력도 쇠퇴하고 주위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약한 개인이다. 따라서 노년철학은“가족과 주위의 도움을 받거나 폐를 끼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좀 비참하지만 약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도움과 폐에 보답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사상과 가르침이다(211쪽). 노년자(老年者)는 동아시아의 문화사상으로서의 조화참여(造化參與)를 사람들에게 말함으로써 비로소 “도움과 폐에 보답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4. 오오하시씨의 노년철학을 어떻게 활용할까?

(1)강한 개인에서 약한 개인으로의 전환

전후(戰後) 일본에서는 강한 개인이 회사사회를 지탱해 왔다. 그것이 진전되는 가운데 인간의 관계성을 기르는 지역공동체는 파괴되고, 시민사회도 성장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일본인이 타자와의 관계성을 단절시키고 자기책임으로 몰아넣는 현실의 근원에는 이러한 사회구조가 있다. 그 피해를 정면으로 받고 있는 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노인이다.

이러한 현실을 바꿔나가는데 공헌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노인세대이다. 오하시씨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노인을 약한 개인으로 이해한다. 강한 개인으로 상징되는 것이 ‘욕망에 사로잡힌 채 지상을 기어다니는’ 동물로, 이것이 현대문명의 모습이다.

오하시씨는 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하늘을 우러르고 땅에 뿌리를 내리는 수직적 식물적 생명・문명을 중시하고, 동물적 생명・동물문명의 일극(一極) 지배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는 동물적인 것과 식물적인 것의 상관〮공존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보다 나은 인류문명의 미래가 열린다고 제안하고 있다.

현실변혁의 주체자를 약한 개인으로 이해하는 시점은 결코 아무 것도 못한다는 자포자기의 입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식물적 삶으로 비유되는 약한 개인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우러르며 수직적으로 사는 것을 통해서 외부성으로서의 태자인 천(天)〮자연(自然)에 몸을 맡긴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자타동일(自他同一), 상호관계성 속에 자기를 위치지울 수 있다. 이것은 신란(親鸞, 1173-1263)이 만년에 도달한 ‘자연법이(自然法爾)’ 사상으로 이어진다.

신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自然)에서 자(自)는‘저절로’라는 의미로 불도(佛道) 수행자의 자기중심적 사려분별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연(然)’은 진실에 눈을 뜨게 하는 외부성의 작용, 모든 것은 무수한 상호관계성 하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하는 작용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도 자기중심적인 자기의 사려분별에 의한 것은 아니다.”

‘법이(法爾)’란 인간에게 의식변혁을 하게 하는 외부성으로서의 아미타불의 영성의 작용을 의미한다. 이 작용에 의해서 자기중심주의는 포기되고 자연과 상호관계에 있는 삶의 방식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약한 개인은 자각적인 주체적 개인, 타자와 연대할 수 있는 ‘유연한’ 개인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대립하고 있던 동물적 삶은 연대하는 존재로 전환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형태로 식물적 삶이 동물적 삶과 교차될 때 생활의 기반이 되는 공동체는 부활하고, 서구형 근대와는 다른 근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상호관계성에 기초한 연대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연대의 장이 공동체이다.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연대하기 위해서는 지역에 뿌리내린 토착문화가 필요하고, 이 문화가 연대의 유대가 된다. 일본에서는 15세기 중엽에 신란(親鸞)의 평등사상을 구체화한, 도시의 자치공동체로서의 지나이쵸(寺内町), 농촌 자치공동체로서의 소손(惣村)이 생겨났다. 여기에서 우리는 서구 근대와는 다른‘토착적 근대’의 구체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2)약한 개인과 현실변혁

내가 살고 있는 욧카이치시(四日市市)의 토미다(富田) 지역에서는 지역공동체의 재생을 꾀하기 위해 60년간 중단되어 있던 토착문화로서의 ‘무시오쿠리행사’(虫送り行事=해충퇴치행사)를 지역 노인들이 2008년에 부활시켰다.

이 행사는 벼를 갉아먹는 해충을 횃불로 퇴치하는 행사로, 해충을 지역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 목적이지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횃불에 타 죽는 해충도 있다. 그래서 이 행사에서는 지역의 토미다불교회(富田佛敎會)서 희생자를 추도하는 법회(해충공양)가 행해진다.

무시오쿠리행사에는 “농업생산물을 많이 수확하고 싶으니까 해충들을 죽여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는 농민의 마음 속에 스며있는 자기중심주의를 되묻고, 무시오쿠리를 인연으로 하여 인간과 자연의 공생(상생)을 생각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자손을 남기기 위해서는 벼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약자로서의 해충’의 입장에 서면 해충의 행위는 단순하게 부정할 수 없다. 이 행사를 통해서 “나만 좋으면 된다”고 하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공동체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고, 그로부터 지역공동체가 인간화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이 지역은 신란(親鸞)의 정토진종(浄土眞宗)이 500년 전부터 뿌리내리고 있고, 인구의 80%가 정토진종 신자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타자와의 공생(상생)관은 침투하기 쉽다. 이 행사에는 공동체의 전 구성원이 참여하고, 어린이들이 연장자로부터 횃불 만드는 법을 배움으로써 연장자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나고, 손수 만든 횃불을 부모와 함께 불을 붙여 행렬함으로써 가족의 유대가 강화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 행사에서 맨 앞에 서는 것은 70세 이상의 노인들이다. 지역의 삼세대가 교류하는 이 행사는 올해로 14년째를 맞이하는데, 지역자치회의 협력도 있고 해서 총 500명 가까운 주민이 참가하고 있고, 이 활동을 통해서 지역공동체의 유대는 강화되고 있다.



맺으며

오하시씨의 노년철학의 매력은 노인을 자기책임으로 몰아넣는 사회적 현실의 근간에 있는 서양 근대의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동아시아의 토착사상과 문화를 축으로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는 또 하나의‘근대’(토착적 근대)의 제기와, 그것의 실천자로 노년자(老年者)를 위치지우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제안은 결코 탁상공론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을 재구축하는데 있어서도 현실을 변혁하는 힘이 되고 있다. 오하시씨의 제안은 일본과 공통되는 풍부한 토착문화를 지닌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번역: 조성환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