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옥 수필가

김정옥 수필가

[동양일보]봄바람이 불었다. 친구와 점심을 한 후 곧장 집으로 들어가려니 뭔가 아쉬웠다. 이왕 나왔으니 쇼핑몰에 들러 옷 구경이나 하자고 선수를 쳤다. 친구도 별다른 계획이 없는지 줄레줄레 따라나선다. 노랑을 만나게 된 계기였다.

옷 가게에서 우리는 물 만난 활어처럼 펄떡였다. 이 옷 저 옷 몇 벌을 입었다 벗었다. 그러다 하늘색 상의 하나 사서 기분 좋게 나가려던 찰나였다. 입구 쪽에 있던 노란색 니트 셔츠가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봄은 노랑으로부터 시작된다. 잠자던 대지가 깨어나는 빛깔이다. 새봄을 알리는 얼음새꽃을 비롯하여 개나리, 양지꽃, 민들레가 봄의 전령사 아니던가. 생강나무, 산수유, 유채꽃이 동네방네 만발하여 마음마저 노랗게 물들면 봄이 절정이다.

봄의 은유인 노랑은 따스함으로 치환된다. 노랑은 빨강, 주황과 더불어 따뜻한 색의 대표 주자이다. 미술 시간에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에 관해 배우지 않았다 쳐도 감각적으로 노랑이 따뜻한 느낌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노랑은 오방색의 중앙에 있고 우주의 중심을 나타내는 색이다. 노란색은 ‘놀, 눌’로 땅을 뜻하는 ‘누리’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릴 때면 노란색으로 밑그림을 그린다. 노란색이 색의 기본인 줄 알고 있는 걸까.

지금은 추억 속에 가물가물한 백열전구 속 필라멘트에 흐르는 불빛이 노랑이었다. 갑자기 정전되었을 때 켠 양초가 눈물을 흘리며 주위를 밝히던 색도 노랑이었다. 사람들은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고 말하지만, 나는 태양에서 노랑을 보았다. 정동진에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가 바다에 풍덩 빠져 반짝반짝 노랑 물결이 일으켰다. 빈센트 반 고흐는 ‘태양과 햇빛을, 나는 달리 표현할 수 없어 노란색, 옅은 유황색, 연한 황금빛 레몬색이라 부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랑인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노랑의 맛은 두말할 것 없이 고소함이다. 노란 콩가루를 한 움큼 넣으면 무엇이든 맛있어진다. 쑥국, 인절미, 국수가 노랑의 마법 가루를 만나면 감칠맛이 나고 입맛을 돋운다.

그렇다고 노랑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버릇이 없거나 언행을 함부로 하는 아이들에게 ‘싹수가 노랗다.’고 하기도 하고 속이 좁고 마음 씀씀이가 아주 인색한 사람을 낮잡아 ‘노랑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속이 불편하면 얼굴이 노래지고 오래 앓거나 굶주렸을 때 누렇게 뜨기도 한다. 사람에게 찾아오는 노랑은 건강에 적신호다. 이럴 때 노랑은 두려움이다.

노랑은 생의 시작이고 결실이다. 샛노랗던 인생이 세월 따라 흐르다 보면 점점 색이 바래지며 누렇게 된다. 누렇다는 것은 익음과 성숙의 또 다른 표현이다. 누렇게 펼쳐진 황금 들판과 노란 해바라기, 누렇게 늙은 호박처럼 말이다.

내가 아직 덜 여문 노랑이라면 혹시 촉도 틔우지 못할 덜 여문 씨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좋은 마음의 씨(仁)로 여물게 해야겠다. 마음밭에 덕이 넝쿨져 뻗어가도록 말이다.

노랑 타령을 한참 했더니 온몸에 샛노란 기운이 물들었나 보다. 갑자기 햇귀가 비쳐 마음이 따뜻해지고 여고생같이 생기발랄한 열정이 불끈 솟는다. 이제 나의 황금기인 황혼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자.

아자, 아자 내 앞에 황금물결이 출렁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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