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 세목 협정의 억압

그러나 일은 이와 같은 서약서를 취한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도교위는 숨통을 끊을 듯이 추격을 가해 왔다. 각서와 동시에 도교위와 PTA 대표 사이에서 ‘양해 사항’이 교환되었지만, 여기에서 ‘각서’ 조항의 구체화를 꾀한 ‘세목’을 정하기로 했다. 20일 이내 이 세목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교섭했지만, 도교위는 그것이 정해진 세목을 전부 인정한다고 할 뿐이고, PTA가 이를 거부하거나 교섭 타절을 선언, 먼저 30일에 신학년의 개교(4월 5일로 예정)를 무기 연기시키기로 각 조선인 학교장 앞으로 통달했다. 이어서 4월 7일 PTA 대표에게 “도립 조선인학교 운영에 대해서 지난번에 수차에 걸쳐 회담해 왔지만, 그 사이 귀하의 성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심히 유감이다. 여기에 최후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통고한다”는 문자 그대로 최후 ‘통고’를 해 왔다. 그것은 진심으로 위압적인 문투였다. 참고로 그 내용을 여기에 옮겨 두기로 한다.



1. 1954년 3월 20일 자 조인의 각서 및 본 위원회에서 제시한 세목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물론 그 밖에 일체 본 위원회의 지시에 따를 것.

2. 1954년 4월 9일 오후 5시까지로 전항에 대해서 무조건 승낙의 회답을 본 위원회에 제출할 것.

3. 지정 기한까지 무조건 승낙하는 회답이 본 위원회에 도달하지 않는 경우, 또는 무조건 승낙하는 회답 이후라고 하지만, 제1항에 위반된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유감이지만 폐교한다.



무조건 승낙이냐, 또는 폐교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것이고, 이것은 식민지 지배자의 태도 그 자체였다. 같은 시기 같은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서 정부는 ‘교육 2법률’을 제정했지만, 비록 강행 체결에 의한 것이기는 해도 일본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문제일 경우에는 의회를 통해서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에 비해서 재일조선인의 교육에 대해서는 행정의 전횡(專橫)으로 일을 결정하고, 당사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예속적인 복종만을 강요했다. 이는 회답 기한인 4월 29일의 상황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굴욕의 장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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