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하시 켄지 스즈카의료과학대학 강사

오오하시 켄지  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강사
오오하시 켄지 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강사

 

[동양일보]자본주의 글로벌리즘은 왕성한 경제활동에 부적합한 존재로서 비생산적인 인간, 즉 ‘약자’를 잘라버리고, 그와 같은 이유로 그전까지는 도시 한구석에 간신히 남아 있었던 지역주의(localism)나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를 분해·파괴·철폐시켰다. 소속하는 회사나 조직과 다른 곳에서 인간적인 ‘유대’를 찾거나,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장소를 찾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글로벌리즘은 자립한 개인, 비의존적인 주체, 경제 합리적인 정신을 대전제로 성립된다. 근대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의 대표적 철학자인 앨러스터 매킨타이어(1929- )는 이에 대해 인간의 ‘약함’ 즉 ‘상처받기 쉬움과 깨지기 쉬움’(vulnerability and fragility)에 인간의 본질을 본다.(<의존족인 이성적 동물>, 원저 1999; 일본어판 <依存的な理性的動物 ─ヒトにはなぜ徳が必要か─>, 高島和哉 역, 法政大学出版局, 2018)

인간이란 자립적이고 비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의존하는 지적 동물이며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의존적인 이성적 동물’(dependent rational animals)이다. 인간은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수고(受苦, afficti)를 겪게 되기 쉬운 ‘상처받기 쉬운’(vulnerable) 존재이다. 특정한 타자들에게 의존하고 보호와 지원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는 노인과 유아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따라다니는 ‘상처받기 쉬움과 수고(受苦)’ 때문에 남에 대한 의존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 근본조건이 된다. 지역에 뿌리내린 전통적인 공동체(community)는 생득적으로 ‘상처받기 쉬움과 깨지기 쉬움’을 부여받고 ‘상호의존적 자기’인 우리들 개개인에게 상호부조와 인간존재의 본질을 자각‧ 환기시키는 장(場)이다. 현대 글로벌리즘에서 필연적으로 생긴 ‘강함’의 문명에 의한 일극지배—이것을 상대화시키는 것으로 ‘약함’의 문명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면, 몸과 마음의 ‘약함’이 불가피한 노인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가진 ‘약함’과 깊이 관련된 공동체가 그 핵심을 이루고 중심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

경제지상주의의 현행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즘이 헌신짝처럼 버리고 쳐다보지도 않는 인간적인 ‘유대’, 이것을 지지해주는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공동체들의 재생은─근년에 유럽에서 대두하고 있는 ‘뮤니시팔리즘’(municipalism)은 선거에 의한 간접민주주의에 한정되지 않고 지역에 뿌리내린 자치적인 민주주의와 합의 형성에 의한 정치참여를 중시하는 지역공동체적인 생각으로 ‘지역주권주의’나 ‘지역자치주의’로 번역되고 있다.─ 인간적이면서 보다 나은 미래로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희망이다. 오로지 이기적인 ‘개인’으로 닫혀가고, 분단되며, 인간 서로의 관계성이 한없이 희석되어가는 현대사회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와 ‘효’라는─에릭 에릭슨이 말하는 세대계승성‧ 생명연쇄성(Generativity)─ 전시대적인 ‘유대’를 단서로 인간이 참으로 살만한 장소‧ 공간으로 변용되어야 한다.

현대문명의 패러다임 전환은 새로운 가치의 축으로 한스 요나스의 ‘세대간 윤리’( Inter-Generation Ethics)와 더불어 ‘세로축’으로 생명연쇄성, ‘가로축’으로 공동체주의 (Communitarianism)의 연동이 요구된다. 현대문명을 상대화할 수 있는 대립축 ‘그랜드 세오리’는 ‘세대간 윤리’ ‘효=Generativity’, ‘공동체주의’의 연계‧ 연동에 있다.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이 신심적·생활적 ‘약함’을 공유하는 노년세대와 연소세대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현대문명은 경제성장형 사회이다. 그것은 베네딕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남성 장년기를 정점으로 하는 ‘강함’이 일극지배하는 문명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해방'을 주장함으로써 언젠가 지구·인류를 파멸로 이끈다. 이에 대해 유엔이 지구·인류 존속을 위해서 정한 국제목표인 ‘지속가능한 개발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는 전근대적·정상형(定常型) 사회를 지향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기해방’이 아니라 ‘자기억제’를 재촉한다. ‘강함’이 요청되는 현대문명의 핵심에 있는 남성 장년세대가 그 ‘positive capability’에 있어서 ‘시장’과 적합적인데 대해, 노년·연소세대는 ‘부정적인 것을 참고 그것을 짊어지는 능력’(negative capability)으로서 ‘효(孝, Generativity)=생명연쇄성’과 ‘지역주의’(localism)에게 보다 친화적인 존재가 된다.

신자유주의 글로벌 경제가 오늘날처럼 극도로 창궐하지 않았던 옛날의 1944년에 그 시장원리주의의 기만성과 위험성을 재빨리 간파해 철저히 비판한 헝가리 출신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1886-1964)는 고전적 명저인 <대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일본어역 1975)에서 산업문명을 새로운 ‘비시장적 기초’ 위에 재구축하고, ‘경제’를 ‘사회’에 다시 파묻을(reembed) 필요성을 강조했다. 폴라니가 ‘문명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에 불가결한 조건으로 말한 ‘비시장적 기초’ 혹은 ‘사회’란 바로 비 ‘서양근대적’인 인간적 ‘유대’ 즉 공간적 관계성인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와 시간적 관계성인 ‘효’=‘Generativity’ 등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세대를 몰아내면서 해마다 증가하기만 하는 고령자들은─총무성 추산으로 2040년에 총 인구에서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35.3%─ 포스트 코로나의 ‘인생 100년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려되는 것은 제일선을 물러나도 건강하고 혈기왕성한 노인들끼리 하나로 뭉쳐서 자기들의 권리를 소리 높이 외치거나, 혹은 자기들의 ‘강함’을 맹신하고 노인지배(gerontocracy)를 통해 옛날의 꿈을 다시 되찾고자 하는 등 연장자의 교만함을 표출하는 일이다.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건강한 세대·장래세대에 의한 ‘노인구제’(Extermination of the elderly)라는─이 충격적인 말은 타케모토 요시츠구(竹本善次)의 <노인구제>(Anti-Elders War; 光文社, 2006)에 의한 것임─ 무서운 현실이냐, 고령자에 대한 격렬한 혐오의 분출이라는 큰 불행, 심각한 세대간 대립이냐의 둘 중 하나다.

이리하여 노년철학은 윤리학, 아주 문명론적인 윤리학이 된다. 이것을 심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사상 철학분야를 넘어서 문학과 사회과학, 구시대적인 것으로 제2차 대전 이후 별로 돌아보지도 않았던 유학사상 혹은 동양고전, 생명과학과 지구·우주물리까지 폭넓은 지견(知見)을 집약・ 정리・ 논의해서 보편성 있는 인륜의 학으로 제고시키기 위해 사상·철학적으로 이것을 다듬어가는 끈질긴 노력이 요구된다. 나이든 이만에 한정되지 않고 뭇 인간에게 걸맞은 ‘윤리’에 대한 노력을 베르그송은 탈(脫) ‘물질’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이 ‘물질’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물질은 항상 정체되고 제자리에 머무르려고 한다. 이에 대해 생명은 이와 같은 물질의 유혹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상승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힘’이다.

생명과 물질의 관계에 대해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1907)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물을 생성하는 생물인 우주는 긴장하면 ‘생명’(정신)이 되고, 이완되면 ‘물질’로 변한다. 물질이란 ‘낙하하는 저울추’이다. 항상 정체·정지·하강하면서 제자리에 머무르려고 한다. 이에 대해 생명은 이와 같은 물질의 유혹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상승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물질이 내려가려 하는 언덕을 거꾸로 올라가려 하는 힘, 물질과 거꾸로 작용하는 힘, 낙하하는 저울추를 들어 올리는 힘─생명이란 물질의 저항을 이겨내는 ‘노력’이다. 생명은 내리려고 하는 물질을 올리려 하고, 물질을 이용해서 그것을 본래의 힘 발휘와 새로운 창조에 사용하고자 한다. 하향운동 하는 물질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이며, 우주의 진화와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 생명이다.

베르그송이 말한 바와 같이 생명에 대해 물질은 장애물로 존재한다. 그러나 생명은 물질 없이 자유를 얻을 수도 없고, 타자와 어울리고 자기를 해방시키며 자기를 실현할 수도 없다. 생명은 물질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물질을 자기 지배하에 둘 수 있어야 비로소 생명은 생명일 수 있다. 하지만 생명력이 봇물 터지듯 활발하게 작용하는 유아·청년기를 제외하면, 노년을 맞이한 인간의 몸은 종종 그 주인의 ‘생명’을 죽음의 방향으로, 즉 ‘물질’의 정체·정지·하강 쪽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것은 나태함과 무위함, 공허감이나 염세관, 불쾌·불만함 등, 즉 활발발지(活潑潑地)한 ‘생명’의 자연스러운 작용에 제동을 걸고 그것을 ‘물질’ 수준으로 끌어내리고자 한다.

늙은 인간은 ‘물질’의 하강・정지・정체하려는 힘에게 자기 ‘생명’을 무조건 맡김으로써 남아 있는 귀중한 나날을 쓸데없이 허비하지 말아야 된다. ‘물질’의 낙하하고자 하는 저울추를 들고 올리고자 하는 ‘노력’,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날까지 멈추지 않는 그 ‘노력’이야말로 인간의 ‘생명’을─우주의 진행과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불멸의 높이로 반드시 끌어올려 줄 것이다. 에도시대(江戶時代)에 ‘평생학습’을 실천한 유학자인 사토 잇사이(佐藤一齋)가 80세 때 쓰기 시작한 <언지질록>(言志耋録, 1853; <言志四錄> 총 4권의 마지막 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노인은 평소 삭연(索然)하여 재미없이 살지만, 마땅히 늘 희기(喜氣)를 간직하면서 스스로를 키워야 한다.(老人平居索然不樂. 宜毎存喜氣以自養)



나이가 들면 인간은 평소에 외롭고 무엇을 하겠다는 의욕도 없이 우울하고 지루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경우가 많다. 이래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항상 환하고 기쁜 기분으로 있는 것이 중요하다. 고령자가 흔히 빠지기 쉬운 ‘삭연(索然)’이나 ‘불락(不樂)’, 즉 어쩐지 침울한 기분, 외로움과 재미없음, 혹은 불만·불평·푸념, 울분과 불쾌함 등 우울한 회색의 기분─그것은 그들의 ‘생명’이 우주의 진행과 반대로 하강·정지로 나아가는 ‘물질’적인 것에 압도되고 패배함을 말해준다. 나이를 거듭하고 병들어서 몸이 쇠약해지더라도 ‘생명’은 ‘물질’의 유혹을 가능한 한 물리치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주의 진행과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생명’을 마음껏 작동시키는 것은 나날에 ‘희기(喜氣)’를 유지하는 ‘노력’에 달려 있다.

72세로 죽은 공자는 15세 때의 ‘십오지학(十五志學)’부터 55년 후에 도달한 나이듦의 심경을 ‘칠십이종심욕불유구(七十而縱心欲不踰矩)’라고─일흔이 되면서 종심하고 원하는 바가 법도를 넘지 않게 되었다.─ 말했다. ‘종심’(縱心)─당(唐)나라의 <개성석경>(開成石經;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교 경전의 석각본이다. 837년에 완성)에 ‘七十而縱心欲不踰矩’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유종원(柳宗元)은 ‘칠십이종심(七十而縱心)’으로 끊고 ‘욕불유구(欲不踰矩)’로 이었다.(<與楊晦之書>) 종심이란 마음을 종(縱; 세로, 쏘다, 풀어주다, 늘어놓다)하는 것이다. 이것은 천공을 향해 쏘아지는 명랑한 망아(忘我)의 깨달음, 깊은 행복감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노년기 특유의 주관적인 행복감, 초월 또는 해탈의 경지는─에릭손의 생애발달이론을 계승한 라시 톤스탐(스웨덴의 사회노년학자, 1944-2016)은 이러한 심경을 ‘노년초월’(gerotranscendence)이라고 부른다.─늙음에 이르는 나날의 끊임없는 배움에서 생긴다. 공자의 자기향상에 대한 노력이 비의존적 자기(independence self)나 자기 내면에 전념하는 자기몰입적인 자기(self-absorptional self)로 닫히지 말고 널리 타자로, 세계로, 그리고 미래로 열린 것이었음은 그 언행록인 <논어>(論語)에서도 볼 수 있다.

2021년의 NHK 대하드라마 ‘청천을 찔러라(靑天を衝け)’의 주인공으로 곧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대신하여 ‘1만엔권의 초상’이 될 일본 자본주의의 시조인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1840-1931)는 <논어>를 각별히 사랑한 역사상의 위인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노년기의 이상으로 다음과 같은 옛 시구를 들었다.



하늘의 뜻은 석양(夕陽)을 중히 여기고, 인간 세상은 만청(晩晴)을 귀히 여긴다.(天意重夕陽, 人間貴晩晴)

(<實驗論語處世談>, 實業之世界社, 1922)



인간은 만년이 훌륭하면 젊었을 때 저지른 사소한 실수나 오점 같은 것을 세상 사람들은 탕감해 준다. 반대로 젊었을 때에 아무리 훌륭해도 만년에 실패하면 쓸데없는 인간으로 치부되고 만다. 노년기에는 끙끙 앓거나 푸념하지 말고 쾌활한 행복감으로 가득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만청’(晩晴)의 ‘청’(晴)은 뜻을 나타내는 해 일(日)과 소리를 나타내는 푸를 청(靑; 啓・ 開)으로 이루어진다. 구름이 개고 태양이 환하게 빛나고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높고 널찍하며 텅 비우고 맑디맑고 환한 노년의 심경이 바로 ‘만청’인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종심’이나 톤스텀의 ‘노년초월’(gerotranscendence)과 같은 경지이며, 사토 잇사이의 ‘희기’와도 상통한다. 노년기의 성공이 사회적인 성과와 외형적인 훌륭함뿐만 아니라 남이 모르는 자기 마음속의 이러한 심경을 획득하는 데에도 있다는 것은 성공이나 훌륭함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큰 구원이 된다.

신형 코로나는 인간에서 이동과 인적교류의 자유를 빼앗고, 고령자와 몸이 약한 사람들에서는 생명을 앗아가며, 현대사회에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적지 않은 불행과 비극을 가져왔다. 밝고 활력이 넘친 세계가 될 것만 같았던 21세기는 갑자기 웅크린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버린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포스트 코로나를 살아갈 고령자들은 현재와 장래를 비관해서 쓸데없이 탄식하고 침울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는 나이듦의 나날을 항상 ‘희기’와 ‘만청’으로 가득차고 맑고 환하며 건강한 심정으로 보내는 것─평범하지만 이것을 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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