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동양일보]●폐교 반대 투쟁(1)

6항목 문제의 강제에서 조선인학교 폐교 처분 결정까지 이르렀던 것은 도교위의 억압 속에서, 도립조선인학교 당사자에게는 1954년이라는 해는 한편으로는 투쟁을 또 한편으로는 교육을 전개했던 그 어느 때보다도 가혹한 1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도교위를 향한 투쟁은 당초 ‘폐교 반대’ 투쟁이었다. 그러나 폐교 처분이 결정된 이후, 특히 조선인의 생활실태 조사를 거친 1955년 초겨울부터는 “국교가 조정될 때까지 폐교를 연기하라”는 말하자면 조건부 투쟁으로 변경되었다. 조선학교 당사자만의 운동으로는 정책을 저지하여 변경시킬 수 없으므로 그동안 정력적으로 일본 국민의 각계각층에 알려서 이 운동에 협력을 호소하였다. 예를 들면 조선인 고교의 학생 자치회는 한 해 동안 무려 350여 차례에 걸쳐서 일본인 학생과 접촉할 정도였다.

폐교 내정 안이 유출된 9월 20일 재일조선인학교 PTA 전국연합회와 재일조선인교육자 동맹은 ‘조선 아이들의 교육을 지키기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내고, 일본 국민을 향해 당사자의 심정을 호소하였다. 여기에서 먼저 “우리 조선인은 과거에도 현재도 이와 같은 위정자에 의해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노예와 같은 생활로 굴욕을 받아 왔다”는 것을 고하고,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학교를 세워 “예속과 굴욕에 의해서 왜곡된 민족의식을 바로 잡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재일조선인이 일본 국민으로부터 먼저 이해받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사항이었다.

이어서 전후 조선인학교는 정부에 의해서 적시되어 온 원인을 설명해 본다.

조선인학교 ‘정치학교’ ‘편향 교육’으로 간주해 버리는 정부의 체질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점을 일본 국민이 이해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재군비 강행·전쟁정책의 심화가 “침략 사상을 부채질하는 군국주의의 부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이 일이 조선인의 처우 문제가 되자, 조선인을 귀찮은 존재로 취급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존재나 되는 것처럼 선전하여 일본 국민의 눈을 정치에서 다른 데로 돌리는 데 오히려 이용하였다.”

이에 대해 “교육에서 자행되는 이러한 지배자들의 무모한 정책에 반대하여 조선인의 민족적 권리의 옹호를 위해, 그리고 평화를 위해 싸웠던 것이 정치교육으로 선전되어 마침내 민족학교 폐지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후에 도교위가 말하는 폐교의 두 가지 이유에 반론을 가했다. 첫째는 외국인이므로 일본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민족교육은 불가하다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 저지른 역사적 행위를 망각하지 말라고 함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재일조선인에게 납세 의무를 지워 매년 수 십억 엔을 내게 하면서도 기본적인 생활권과 교육권조차 박탈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였다.

둘째로는 도교위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원래 동화교육의 강제는 “콩을 팥이라고 가르치는 사고로서 올바른 방침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런데도 “봄 이래의 극단적인 간섭과 무리한 지시”에 “성의껏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의를 짓밟았다고 호소하였다. 이렇게 해서 특히 1948년 이래의 피억압의 추이를 염두에 두면서 “우리 조선인은 과거 8년간 이로 인하여 늘 고통 속에 살았으며,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며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였다. 이것이 바로 재일조선인의 ‘전후’의 실태였다.



성명서는 이어 “오늘의 조선인학교 탄압은 전쟁정책에서 온 것으로 조선인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지적하고, “민족적 편견을 일소하고”에서 조·일 양 국민의 단결을 촉구하면서 끝을 맺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본 국민은 이와 같은 당사자의 호소를 즉각 납득할 만한 이해 구조로 되어 있지 못했다. 오히려 도교위에서 흘리는 폐교 이유를 그대로 인식하고, 민족적 편견에 새로운 덧칠을 가하고 있었다.

분명 사립 이관에 대한 반대 투쟁의 때에 비해서 정당을 본받지 않고 특히 일교조(日敎組)가 조직으로서 반대 운동에 맞붙어 싸운 점은 전진이었다. 일교조는 6월의 동 정기 대회에서 집중으로 ‘조선인학교 대책부’를 열고, 폐교 결정 통지 후의 중앙위원회에서는 “조선인 학교폐교에 반대하고, 계속 교섭을 필요로 했다. 또 일교조를 중심으로 그 밖의 교조는 한일 우호 운동을 강하게 추진하고, 기관지 등을 통해서 조선인학교 실태를 하부에 더 많이 넓혀 알려 나간다”고 하는 결의를 채택(10월 8일), 같은 10월에 폐교 반대 성명을 낸 도교련(都敎連)과 함께, 폐교 반대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 일본 공산당도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에서 “도쿄도의 도립조선인학교 폐지의 통고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내걸고(10월 14일), “한·일 양 민주 단체의 연대와 통일”을 통해서 반대 운동의 힘을 강화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 조직적인 차원의 반대 운동은 폐교가 결정된 후의 10월 이후에 주로 전개되어, 운동으로서는 때가 늦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조선인학교 실태에 관한 정보를 전하면서 이 일에 대한 정치적 이해를 중시하고, 이를 위로부터 알려 나가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사건의 정치적 본질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민족적 편견에 사로잡힌 층에 대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은 할 수 없고, “진정 아래로부터의 운동으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 점에서는 ‘편향 교육’에 대한 공격을 받고, 교육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두 법률을 강행 체결이라는 교육반동화의 1단계를 거치고 난 후 이 시점에 이르면, 교육운동의 지도부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반동의 근원은 같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해서 요시다(吉田) 정부와 도교위가 저지르고 있는 만행은 지금 오다치(大達) 문부상을 통해서 일본 국민과 교원에게 가해진 파쇼적 탄압과 교육의 군국주의화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아카하다’에서는 주장)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반동의 근원은 같다고 하는 정치적 파악을 교육운동의 지도층은 갖고 있었다. 일교조의 한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조선인에게 대한 탄압은 그대로 일본 국민에 대한 탄압이었다”고 하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阪庭秀淸, ‘조선인학교 폐교와 일본인의 불행’, ‘새로운 조선’ 1955년 2월호.).

이러한 고통의 근원은 같다고 하는 인식에 따라서 다음으로 “일본 국민을 선동하여 재일조선인을 일본 국민과 이간질로 점차로 노예화하고 쥐어짜 간다”(‘아카하타’는 주장). 지배자의 분열 정책에 항거해서 朝日 양국 국민이 서로 연대하고, 그 우호 운동의 발전을 내용으로 하면서 폐교 처분에 반격을 가하고자 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계급적·정치적으로 먼저 이해·선전하는 것이 기본이고, 불가결한 작업이기도 하였다.

단 그것만으로는 활동가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민족적 편견을 근원적으로 뿌리째 뽑아내는 작업은 할 수 없다. 오히려 차별과 편견의 토양 위에서 피상적이고 대중 조직화에 이르지 못하는 약점을 현실적으로 안고 있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역사적·생활적 이해의 시각을 중시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저널리즘은 도교위의 의향을 그대로 믿는 것이 대세였다. “도민의 세금이 조선의 편협한 민족교육을 위해 사용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고, “일본의 원조에 의한 개교는 인정하지 말라”는 식의 강경론이 주류를 점한 것이었다(‘도쿄 신문’, ‘방사선’ 중 1954년 3월 14일 및 4월 6일.). 이러한 일반적인 풍조 가운데서 조선인 고교에 관심과 호감을 갖고 있다는 학생조차, 조선인은 일본에서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비롯하여 “일본에 살고 있으면서, 쓸데없이 귀찮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면서까지 조선어를 배우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라든가, “일본 정부가 외국인 자녀들의 교육비를 국비에서 충당한다고 주장, 이것은 불법인 것은 아닌가?” 하는 비난의 의문을 던져 온 것이었다(朴壽南, 앞의 기록).

또 교사로서도 이와 같은 비난을 가해서 “필로폰 몰래 제조하는 자의 아이들로부터 일본의 아이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 싶다”라고 하는 의견이 나오고, 조합 지부 회에서도 “자세한 실정을 알려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문제를 회피해 버리는 실정이었다(倉員保海, ‘조선인학교를 구하자’, ‘새로운 조선’ 앞의 호). 이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재일조선인에 대한 무지와 편견의 “벽은 상당히 단단하고”, “의문을 해명하는 데는 상당히 힘이 든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조선인을 과거 일제의 노예였던 때의 관념으로밖에 보지 않은 일본의 학생들(넓게는 대중)이 아직도 널리 존재하고 있었다. 투쟁의 폭을 넓히는 것은 이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확대해 갔던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정치적 이해의 방법만으로는 설득시킬 수 없다.

또 설득할 수 있다고 해도 의례적인 교제로 끝날 가능성이 강했다. 민족적 편견을 바르게 잡아가는 독자적인 과제로 남게 되고, 정치적 이해도 이와 연관되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이었다. ‘편향 교육’에 공격에 대처하더라도 교육 두 개 법안의 경우와 조선인학교 폐지의 경우는 이러한 측면에서 달랐다.

이처럼 민족적 편견의 벽이 얼마나 두꺼운가를 조선인학교 당사자들에게는 뼈에 사무치게 통감하고 있었다. PTA 및 조교조는 1954년 초두부터 거듭 도교위가 퍼뜨리는 두 가지 편견(폐교 이유)에 도전하여 이 편견을 사실로 대치시키고자 하였다.

민족교육을 ‘편향 교육’으로 보는 편견에 대해서는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설명하여 민족교육의 필연성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세금 사용이 부당하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조선인 노동자를 필요에 따라 사용하다가 버린 일본 자본주의의 역사를 알림과 동시에 1952년도 도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세금으로 10억 엔을 납세하였지만, 이에 비해서 이들에게 지출액은 2억 엔에 지나지 않는 것을(생활 보호비 1억 2천만엔, 교육비 8천만엔) 지시하여, 오히려 “조선인이 혈세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니고, 먹히고 있다”는 실정을 증명하였다.

그렇게 해서 이들의 두 가지 편견은 “민족 이간을 위한 악선전(Demagog,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가)임을 지적하였다.” (1954년 1월, ‘각 부현 敎組 여러분에게 호소함’ 1954년 10월 등등)

그러나 편견에 대해 반론을 대치시키는 것만으로는 “조선인학교는 별도의 문제이다”라고 하는 감각으로 배타적인 편견을 근원부터 뒤집어 갈 수는 없었다. 문제는 또 하나 그 이전에 있었다.

결국, 일본 국민 각층을 대상으로 호소해 나가던 중에 새삼스레 대다수의 일본 국민이 재일조선인의 생활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음을 통감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사자 측은 조선인의 생활과 요구를 현실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편견을 제거할 수 있는 단서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고교생으로서 같은 노력을 거듭해 온 박수남(朴壽南)에게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일본인에게 공작해서 먼저 조선인의 문제를 이해시켜야 한다. 예를 들면 왜 우리 부모가 일본에 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왜 우리가 일찍이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던가? 왜 부모에게 직업이 없고, 술어 절여 살거나 날품팔이 등의 노동자로 힘든 생활에 허덕이고 있는가? 매일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등 조선인에 관계된 것들을 구체적으로 이해시키지 않고서 도대체 어떠한 제휴가 가능하단 말인가?”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렇게 해서 조교조를 중심으로 1954년 가을부터 부모의 생활 실태를 조사하고, 부모의 생활 무대에서 나오는 교육 요구를 받아들여 고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일본 국민에게 알리는 활동에 힘을 쏟았던 것이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