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종 전 꽃동네대학교 총장

유성종 전 꽃동네대학교 총장

[동양일보]사람이란 참으로 고맙게도 ‘생각하는 동물(homo-sapiens)’이라는 은총으로 태어나서, 이성(理性)과 감성(感性)과 영성(靈性)을 누리는 차원과 수준이 복잡다기한 질서체계로 존재한다는 것이 또한 절묘합니다.

그 체계에서 계급과 우열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환락(歡樂)과 고난(苦難)이 함께 있어서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 독점‧ 착취에 대하여, 갈등과 교섭, 시위와 투쟁, 혁명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사람이 만드는 사건사안인데, 그 원동력은 욕구의 동기부여입니다.

현대에 와서, 그러한 시스템이 발전 진화된 지향으로 자유와 평등, 민주와 공화, 정의와 인권, 자선과 사회복지 등의 가치와 희망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대중(大衆)사회는 대의제(代議制)를 통하여 집행자와 피치자의 상호관계를 유지합니다. 그 진전이 어떤 차원이고 어느 수준인가? 그 고하(高下)와 농도(濃度)는 어떤 정도이냐는 신뢰와 화합 또는 불신과 갈등의 해결능력으로 평가하여, 세계는 선진과 후진으로 나눕니다. 그것 또한 체계 및 체제 곧 시스템의 범주(範疇, category)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청주시는 어떤 수준입니까? 우리 고장 청주가 살기 좋고, 남이 부러워하는 곳입니까? 일언이폐지하고, ‘맑을 청’의 청주가 아니라 지저분합니다.

시가지와 도로에 무성한 잡초를 뽑읍시다. 가게 입구에 방치된 잡초도 없앱시다. 길을 막는 주차위반을 근절합시다. 잡다한 간판을 시원하게 정비합시다. 휴무중인 시의원님과 휴직중인 구청장님과 공석중인 동장님이 돌아오시면, 이런 것들은 아주 쉽게 금방 개선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 학생들이 휴지를 마구 버리지 않도록 가르칩시다. 어머니가 마음 쓰시면 금방 고쳐집니다. 전국에서 청주처럼 방치된 도시 관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웃 대전은 참으로 잘 정비된 도시로 변했습니다.

선진국은 논과 밭의 둑도 잡초를 깎아서 해충을 막고 일광을 온전히 받게 하며, 지심을 높이게 만듭니다. 그 시기도 꽃피고 열매 맺기 전에 하여 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스위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의 그 푸르른 초원을 보면서 부러워하지만, 그들은 밭둑 관리조차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간판도 선진국은 도시를 시원하게 확 트이게 건물의 이마에 새기거나, 노포(老鋪 전통 있는 오래된 점포)는 아예 간판이 없습니다.

문제는 관리 담당 기관의 살아있는 행정과 책임자의 성실한 업무수행인데, 이것의 성공여부로 우리의 행복이 판가름 납니다.

저는 1990년 소련이 망해가는 모습을 국제회의 한국대표로 소련에 파견되었을 때, 눈이 시리도록 목격한 바 있습니다. 공산주의 독재 70년의 세월 속에, 모든 국민에게 직업이 주어졌지만, 국민은 따라가기만 할뿐 정체감(正體感=주체성)이 없고, 치자(治者)는 손쉬운 관리방식(독재는 가장 쉬운 통치방법)으로 권좌를 유지하기를 냉전(冷戰)이라는 도구를 써서 장기 집권했습니다. 결과는 국민은 희망과 생기를 잃고, 당시의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가(1987년에 미국에서) 발행한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소련이 망하는 중대요인의 하나는 과다 평등주의로 무규제(無規制, anomic)의 나라가 되어 있다.’고 지적한 것 그대로 왜발전(歪發展)한 상태였습니다. 참으로 모스크바는 최고의 참상(慘狀)이라고 할 상황이었습니다.

세계최대도시 모스크바에서, 일급호텔의 식사는 딱딱한 호밀 빵 한 조각이 전부였고, 우유 한 컵, 사과 한 개를 살 수 없는 경제적 환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외빈(外賓)의 숙소라고 안내된 ‘초대소(60년대는 세계의 방문객이 극찬한 시설)’는 낡아빠진 상태에다가, 더 해괴한 것은 접수와 관리 사무소의 바로 옆 공간이나 계단 밑에 대소변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공항마다(모스크바에는 군용비행장과 동서남북 4개의 공항이 있음) 대기실은 쓰레기더미이고, 그 화장실은 소변기가 막히고 넘쳐흘러 송장냄새로 진동하고, 대변기언저리는 도저히 발 드밀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 대합실에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빈번하게 드나들면서도 아무도 화장실과 유리문의 청소나 수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책임자도 부서의 담당자도 책임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 과다 평등주의—모든 국민에게 직업을 준 것까지로 ‘평등사회’가 되었지만, 모두가 똑같다 하니 명령체계는 엷어지고, 책임질 줄 모르니까 방치하고, 신상필벌이 없으니까 고쳐지지 않고, 결국 행정질서와 관리체계는 문란하고 망가져서 자멸함― 결과는 소련을 멸망케 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상황에서 백가지를 하나로 처리하는 이러한 관리방법을 걱정합니다. 원칙만 고집하여 예외=권형(權衡=융통성과 조화)을 인정하지 않는 옹고집은 위험한 지도성입니다. 막혔다는 뜻입니다.

코로나19 환난에서도 전국을 똑같이 통제하여, 지방의 독자적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묶어놓아서, 민생은 가게를 닫는 사태가 심각하고, 실업자가 속출하여 생업이 어려운데, 중앙은 통제 일변도이니, 그것을 지방장관에게 위임하여 지역 실정에 맞는 민생을 강구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딱하고 안타깝습니다.

다스림(행정)과 베풀음(봉사)의 요체는 구성원의 책임감과 사명수행의 열정이며, 소통(疏通)과 공동(共動)을 그 요령으로 합니다. 그 추진과정의 혁신은 전통과 과거의 부정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합리적 대처방안이라야 성공합니다. 진정성이 없고 의롭지 않으면 그 혁신은 왜곡(歪曲)되고, 잘못 곡용(曲用)되면, 역발전(逆發展)으로 결과하여 자기 발등을 찍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실존하는 모든 것은 사회적 제도(social system)로서 소중한 것이니, 존중하고 공생(共生)해야 올바른 인간사회가 됩니다. 더구나, 편 가르기와 억지 주장과 폭력으로 전진을 외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 행패일 뿐입니다.

제발 우리 고장에서는 나쁜 바이러스가 우리를 오염시키지 않는, 청정 청주가 되기를 간원(懇願)합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