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1주년 ‘참전유공자’ 지현규씨 고교재학 중 자진입대…원산·양구 등 전투

[동양일보 이도근 기자]“끝도 없이 밀려오는 중공군과 치열하게 싸웠죠.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오다가 죽은 시체에서 총, 칼을 주워들고 달려들었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전쟁이란 게 참 끔찍하구나’ 싶더라고.”

꽃다운 열아홉 나이에 자원입대해 6.25 전쟁의 한 복판을 지난 지현규(92·6.25참전유공자회 청주시지회장·청주시 청원구 사천동)씨는 지금도 눈만 감으면 전쟁의 참상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지씨는 청주 남일면에서 6남매 중 셋째로 출생.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재학 중이던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가족과 함께 대구까지 피난을 왔다가 밀양에서 자진 입대했다. UN군(3사단 65연대)에 배속돼 일본 규슈에서 48일간 훈련을 받았다.

“일본 규슈의 오이타현인가 2차 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일본군 훈련소였어요. 풀이 우거져 버러진 훈련소를 손질을 하고 훈련을 받았었죠.”

훈련을 마친 지씨는 군번 ‘K1134163’을 부여받고 1950년 11월께 북한 원산에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여세를 몰아 북진하던 연합군을 지원하는 병력이었다. 군함에서 내리자마자 엉겁결에 전투 일선에 서게 됐다. 낮에는 탱크를 앞세워 전진하고, 밤에는 북한군 기습을 피해 후퇴하는 일이 반복됐다.

“한 달여를 밤낮없이 대치하며 싸우던 중 중공군이 나타났어요. 한 무리가 쓰러지면 또 오고, 또 오고, 정말 끝도 없이 밀려들었죠. 중공군의 대규모 인해전술에 밀리고 밀리다가 결국 흥남에서 미군 군함을 타고 철수했어요.”

지씨가 탄 배가 덩케르트와 비견되는 흥남대철수의 주역인 빅토리아호였다. 군함을 타고 남하한 지씨의 부대는 여수에 내려 다시 서울 재수복 작전에 참여했고, 이후 국군 20사단 61연대로 편입해 다시 경기 이천, 양구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양구 고지전에선 피튀기는 총격전이 이어졌다. 밤마다 어둠 속에서 울려퍼지던 인민군, 중공군들의 위협적인 꽹과리와 피리소리, 총소리와 비명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지씨는 말했다.

“양구 M1고지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열한 전투를 했죠. 새벽 3시쯤 되면 밀려드는 인민군, 중공군을 막아내고…. 한 30m 거리 앞을 놓고 총질을 하니까 견딜 수 없죠. (고지에) 들어가면 쓰러지고… 참 많이 다치고 죽고 했어요.”

전투지를 이동할 때면 폭격을 피하지 못한 적군의 시신이 곳곳에 널려있어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고향도, 소중한 가족들도 생각날 틈 없는 매일이었다. 이후 행정병 등으로 투입됐던 그는 1953년 7월 휴전이 되면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내내 끊이지 않았던 포탄소리가 7월 27일 밤 10시(휴전협전 효력 개시)가 되니까 양쪽에서 딱 끊기더라고요. 전쟁 중엔 언제나 끄고 다니던 차량 헤드라이트도 키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새 세상’이 온 것 같은 경험이었어요.”

전쟁이 끝난 지도 70년. 어느덧 구순의 나이가 된 지씨는 6.25참전유공자회 청주시지회장을 맡고 있다. 대부분 홀로 지내고 있는 전우들의 식사 등 안부를 챙기고 있지만, 곧잘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이 있다. 지씨 자신도 고교 친구이자 전우였던 ‘사시대’씨를 보고 싶다고 했다. “함께 고등학교에 다니던 사시대와 입대도 같이 했어요. 군번도 제가 K1134163, 사시대가 K1134164였죠. 10여년 전 한 번 연락 후 지금은 생사도 모르지만, 만에 하나 살아있다면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글·사진 이도근 기자 nulha@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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