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명희 수필가

권명희 수필가

[동양일보]친구들이 하나둘 은퇴를 하고 있다. 사회가 정해놓은 나이에 은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육십 초반은 너무 젊다. 남아있는 삼십여 년을 어찌 살아야 할지. 저마다의 가치관으로 시간 요리를 하고 있다. 어떤 친구는 여행을 나서고 또 어떤 친구는 배움의 길을 나선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가게를 넘겨받아 쓸고 닦고 간판을 달았다. 비어 가는 가게가 늘어나는 시대에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무료강습이라는 문구 하나 떡하니 적어 놓고 삼십 년 노하우 전수하겠다며 인연을 기다렸다.

가정에서 꼭 필요한 바느질 배우러 하나둘 다가왔다. 금융 쪽에서 삼십여 년 몸담았다 명퇴한 오십 초반 젊은 엄마도 있고, 기술만이 살아남을 길이라며 창업을 꿈꾸며 오는 여인도 있다. 미래에 디자이너를 꿈꾸는 중2 학생도 있고, 귀밑머리 희끗희끗한 초로의 여인도 있다.

해외 여행길도 막혔고 취미 교실도 문을 닫아 갈 곳 몰라 하던 발길이 모여 열두 명이 되었다. 더는 무리일 것 같아 대기자로 연락처를 받아 놓았다.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재봉을 배우겠다고 다가서는 그들과 인연이 되었다.

나 역시 그들에게서 삶을 배운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온 분들에게 따듯한 언어의 지혜를 배운다. 젊은 수강생에게서 변화무쌍한 미디어 세계를 배우고 중2 학생에게서 그들의 세계를 듣는다.

정으로 만들어 가는 인연 공방에 덤으로 귀한 마음이 쌓여간다. 손수 만든 만두를 쪄오기도 하고, 맛있게 숙성된 김장김치를 들고 오기도 한다. 가족 특식 만들었다며 뚝배기에 먹음직스럽게 담은 회덮밥을 들고 오기도 하고, 싱싱한 과일과 야채, 커피와 빵을 들고 오기도 한다. 하루 두 명의 수강생이 가져다주는 사랑이 식탁을 풍성하게 해준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에너지가 생성되나 보다. 회색빛 담을 걷어내고 인연을 만들었다. 오늘도 바느질 공방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졌다. 시끌벅적 건강한 소리를 내며 바느질한다. 초보의 바느질이 삐뚤빼뚤 엉성해도 웃음이 한 바가지다. 세월만큼의 지혜가 한 땀 한 땀 엮여 나온다. 마스크로 막혀있던 말의 물꼬를 터놓았다. 답답하게 막혀있던 이야기가 마구 쏟아진다. 얼마나 풀어놓고 싶은 말이었을까. 시원하게 흘러가는 말들이 길을 찾았다. 인연 공방에서 사람의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이 향기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켜 멀리멀리 퍼져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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