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석 기상청장

박광석 기상청장
박광석 기상청장

 

[동양일보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에 성큼 다가온 가을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사람들은 잔뜩 두툼해진 옷차림으로 거리를 거닐고, 나무들도 때에 맞춰 형형색색 단풍옷을 갈아입는다. 전국 도심과 산지 곳곳에 조금씩 가을의 정취가 배어난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가을의 절정기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변화한 계절 양상이 가을에 위기감을 조성한다. 기후변화가 가을의 시계를 늦추고 있는 것이다. 기상청에서 지난 60년간의 기후변화 추세를 분석한 결과, 계절의 길이와 시작일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여름은 과거보다 20일 길어져 가장 긴 계절이 됐고, 겨울은 22일 짧아져 가장 짧은 계절이 됐다. 실제로 올해 봄 서울의 벚꽃은 99년 만에 가장 일찍 개화했다. 반작용으로 가을의 시작일은 최근 30년 새 9일이나 늦어졌다.

늦어진 가을 시계에 맞춰 단풍의 시곗바늘도 느려졌다. 가을에 기온이 낮아지면 나무는 녹색 색소인 엽록소를 분해해 체내로 흡수한다. 대신 잎에 남아 있는 크산토필, 카로티노이드와 안토시아닌 같은 색소가 밖으로 표출되는데, 그렇게 붉게 때로는 노랗게 단풍이 든다. 그런데 이러한 식물의 단풍은 기온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후변화로 10월까지 높은 기온이 유지되면 단풍이 들기 위한 계절적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다. 기후변화로 지구 평균기온이 점차 상승하면서, 2010년 들어 첫 단풍시기는 1990년대와 비교해 지리산과 월악산이 각각 5일과 2일 늦어졌다. 단풍 절정시기도 지리산은 6일, 월악산은 4일 뒤로 밀렸다.

단풍의 색도 옅어졌다. 기후변화로 가을이 오는 시기가 늦춰지면 태양의 천정각이 낮아져 일조량이 줄어드는데, 이는 안토시아닌 합성을 저해한다. 선명한 단풍을 보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폭우 등 극한기상 발생이 빈번해지면 앞으로 단풍은 제 색깔을 갖기가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보폭은 자꾸만 커지고 있다. 작년 북극의 여름은 평년보다 3~5도 이상 높게 나타나면서 1881년 이후 가장 높은 해로 기록됐다. 그 때문인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이 폭염과 장마, 산불 등 이상기후 현상들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산업화 이전 대비 최근 10년 지구 지표면 온도는 1.09도 상승했다. 만약 온실가스 감축 없이 기온 상승이 계속된다면 이번 세기말에는 3.3~5.7도 오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면 한반도의 많은 식물종이 개체 수 감소나 멸종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국립생태원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우리나라 주요 명산에 분포하는 구상나무, 분비나무 등의 상록침엽수가 25~33%가량 줄었다. 또 잎이 생기고 꽃이 피는 시기가 최근 10년간 각각 13.4일과 9.4일 빨라지는 등 생장리듬에도 변화가 생겼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기후변화가 진행된다면 이번 세기말이면 국내 생물종 5700여 종 가운데 6%인 336종이 사라질 것이란 분석이다. 비단 단풍에 그치지 않을 거란 얘기다.

올해는 유난히 아쉬운 봄이었다. 높은 기온 탓에 개나리, 진달래 등 봄꽃이 동시다발적으로 개화했기 때문이다. 순서대로 흐드러지는 꽃망울의 기쁨을 누릴 새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한차례 계절의 상실을 경험한 채 가을로 넘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올가을 단풍도 예년 같지않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단풍이 찾아오는 설악산에 작년과 평년보다 2일 늦은 9월 30일에 첫단풍이 관측되었다. 이런 추세면 후손들은 우리가 보는 화려한 색채의 단풍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기후변화가 세대 간 기억의 간극마저 만들어낼까 염려스럽다.

경고음은 이미 울리고 있다. 우리 곁에서 가을의 정취가 사라지고 있다. 식물 생태계와 함께 전 인류를 위협하는 기후위기로부터 잃어버린 계절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전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대응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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