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금철 수필가

신금철 수필가

[동양일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른다. 사람의 모습과 성격이 모두 다르듯 산의 모습도 제 각각이다. 계절에 따라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느낌도 다르다.

산을 오르면 삶의 의욕을 찾고,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지고, 때로는 아름다움에 취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또한 자연에 순응하며 제 자리를 지키는 나무들 앞에서 욕심을 내려놓는다.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고, 사랑에 인색하던 마음에 샘물이 솟아오르는 귀한 선물을 얻기도 한다.

건강검진에 희미하게 빨간불이 켜지는 듯하여 가까운 공원을 자주 걷고, 가끔 산을 오른다. 전에는 혼자 산에 오르는 사람을 만나면 왠지 외로워 보였다. 남편이 바쁠 땐 혼자서 가벼운 배낭을 메고 산에 오르다 보니 혼자만의 산행이 결코 외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한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며 내 삶을 정화하고,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젖고, 자녀들을 떠올리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가끔은 나무에게 말을 걸고, 나무에 기어오르는 다람쥐에게도 말을 건네며 혼자 웃는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보고 좀 이상한 여인네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나는 그들과의 대화로 산행이 즐겁다. 게다가 촉촉하게 목덜미와 등에 땀이 배면 건강을 되찾은 듯 만족스럽다.

평일에는 주로 시내를 벗어나지 않고 가까운 산을 오르지만, 주말이면 원거리 산을 찾는다. 가을에 접어들어 강원도의 유명한 숲길을 많이 다녀왔다. 그중 정선과 강릉 경계에 있는 율곡 선생이 이름을 붙인 노추산에 있는 모정탑은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곳이다.

나이 스물셋에 강릉으로 시집온 서울 처녀 차옥순씨는 네 자녀 가운데 아들 둘을 잃고, 남편은 정신병을 앓는 등 우환이 겹쳤다. 그럴 때 돌탑 삼천 개를 쌓으면 우환이 사라진다는 꿈을 꾸고 노추산을 찾아와 26년 동안 돌탑 삼천 개를 쌓고 예순여덟에 하늘로 가신 전설이 아닌 실화의 탑이다.

노추산 계곡은 어느새 가을이 깊어 돌탑 사이로 낙엽이 수북이 떨어져 쌓이고, 단풍이 막바지에 이르러 만추의 운치가 절정이었다. 돌탑 하나하나엔 정성과 눈물이 배인 어머니의 한 서린 슬픔이 가슴을 울렸다.

어머니가 위대한 존재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전설이 아닌 실화라는 점에서 어머니의 위대함을 가슴 깊이 느끼며 그분이 생전에 살았던 흔적이 있는 움막을 드려다 보자 가슴이 뭉클하였다. 전설과 사연이 얽히지 않은 산이 없지만 자식을 위해 모정탑을 쌓느라 힘들었을 어머니의 위대함에 절로 존경심이 솟구쳤다.

치매에 걸려 집도 찾지 못하던 노인이 아기를 낳고 딸이 입원한 병원에 미역국과 밥을 지어 찾아갔다는 눈물 어린 모정 역시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 않았던가!

나는 작은 돌 하나를 얹으며 어머니 생각에 잠겼다. 삼천 개의 돌탑은 쌓지 않으셨지만, 오직 자식을 위해서 살다 가신 어머니의 감사함을 생전에 갚아드리지 못한 죄송함에 내 가슴엔 가을비가 내렸다.

바쁜 생활로 가족의 사랑이 부족한 요즈음 노추산의 모정탑은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함께 가족을 위한 사랑과 희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지독지정(舐犢之情)의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가을이 떠나기 전, 나는 숲의 이야기를 들으러 다시 배낭을 둘러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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