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포석 조명희문학관

 
강찬모
강찬모

 

[동양일보] 13일 충북 진천에서는 28회 ’포석 조명희문학제’가 열렸다. 문학제는 포석(1894~1938)의 ‘83주기 추모제’로 시작됐다. 올해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예년보다 축소하여 진행되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내용들로 채워졌다. 포석 조명희문학관과 인접해 있는 공원이 조명희 선생의 호를 딴 ‘포석공원’으로 명명된 날이기 때문이다. 포석공원이란 이름으로 명명된 것은 단순히 일개 공원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의미를 넘어 선다.

원래 공원의 이름은 ‘진천 1호 근린공원’인데, ‘생거진천 거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11년에 착공을 하여 2015년 12월에 완공을 했다. 진천읍 시가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공원부지에 군립도서관과 청소련 수련관, 포석 조명희문학관 등의 문화시설들이 종합적으로 들어서 있어 군민들의 교양과 문화의 질을 높이는 학습의 장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근린’과 ‘숫자’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의미를 갖지 못한 피동적인 편의의 산물로 지역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개명의 필요성이 제기된 상태였으며 이때 자연스럽게 공론화 된 것이 ‘포석’이었다.

이 공원은 포석의 생가 ‘뒷동산’으로 포석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뛰어놀거나 자주 오르내리며 산책을 하거나 신문 연재소설을 보던 장소였다. 그의 산문 ‘느껴본 일 몇 가지’에 보면 그가 뒷동산엘 자주 오르내렸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구절이 나온다. “14~15세의 일로 기억을 하는데 그때 저녁때가 되어서 밥 먹으라고 조르는 집안사람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보던 신문을 들고 뒷동산으로 올라가 잔디밭의 눈 녹은 자리를 골라 앉아서 추운 줄도 모르고 읽던 소설 끝을 다 읽고 내려와 본 적이 있다.”고 회상하는 대목이다.

이때가 포석이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후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출분을 시도했다 형에게 중도에 잡혀 집에 머무르고 있던 때였다. 민족의 현실에 비분강개했던 피 끓는 젊은 나이에 꿈을 저당 잡힌 채 집에 머무르게 된 현실은 포석에게는 용납하기 어려운 무용(無用)하고 답답한 일이었다. 뒷동산은 이런 포석의 뜨거운 피를 식혀주며 앞날을 설계하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이렇게 포석의 젊은 날의 상념과 추억이 깃든 뒷동산이 ‘포석공원’이란 이름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름의 실질적 기능은 나 자신보다는 타인에 의해 내가 호명되거나 기억되는 의미를 갖는다. 아무리 좋은 이름도 호명되지 못하면 죽은 이름과 같다. 세속적인 ‘출세’를 의미하는 ‘이름을 날린다’는 말도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호명될 때를 말하는 것이다. 호명되지 않으면 잊히는 것이며 잊히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포석공원이란 명명은 포석의 집 뒷동산에 문학관과 더불어 공원이 나란히 자리하는 일로 ‘포석 테마파크’의 성격을 갖는다. 여러 사람들이 오가며 휴식하는 대중적 장소에 포석의 정신이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더구나 ‘포석공원’이라 새긴 표지석은 다른 공원의 표지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조명희의 호는 ‘포석(抱石)’으로 ‘돌을 품었다’는 뜻이다. 이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지켜야 하는 지조와 절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이며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일체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치열함을 의미한다. 포석은 이 같은 의미를 염두에 두며 호를 지었다.

표지석은 포석기념사업회의 제안과 진천군의 지원으로 정창훈 조각가가 돌을 고르고 포석의 종손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의 글씨를 새겨 특별한 의미를 더했다. 표지석인 ‘청석(靑石)’은 한 눈에 봐도 포석의 분신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외양이 범상치가 않다. 필자가 포석의 생가 터를 둘러보면서 가장 참담했던 것은 생가 터의 유실과 함께 ‘벽암리(碧岩里)’라는 동네에 있었던 그 많은 ‘푸른 바위’와 돌의 부재였다. 이곳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터전으로 돌이 삶의 기반이 되는 동네였다. 그러나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그 돌들은 언제부터인가 발파되어 해체되고 그 자리에 아파트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런 작금의 상황에서 매우 뛰어난 미적 가치를 두루 지닌 청석이 포석공원의 표지석으로 세워짐으로써 그동안 안타깝게 생각했던 돌의 부재가 공원과 더불어 한꺼번에 풀리게 되어 여간 다행스러운 게 아니다. 표지석 뒷면에서 문학관 전경을 보면 포석 동상의 넓게 벌리고 있는 두 팔 한 가운데로 표지석이 포석의 품에 안기는 형상으로 호의 뜻을 그대로 재현한다. 조형물은 그 자체의 형태가 한 인간의 삶의 스토리텔링이다. 문학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필자가 반드시 설명하는 부분이 동상에 대한 ‘입체성’과 ‘역동성’인데 이제 한 가지 더 곁들여 설명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포석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오늘따라 포석공원을 감싼 가을 하늘이 참, 높고 공활(空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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