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영 수필가

김숙영 수필가

[동양일보]아침 기도길이다. 호박꽃 다섯 송이가 조롱조롱 매달려 기상나팔을 불고 있다. 함초롬히 이슬 맞은 호박꽃을 가만가만 들여다본다. 벌이 사풋 날아 호박꽃 수술에 앉는다. 다섯 송이 중 두 송이는 꽃받침 아래 동그란 열매를 달고 방싯방싯 웃는다. 호박꽃 인생이 의초로워 특별하다.

‘호박꽃도 꽃이라고 벌이 온다.’라는 옛말이 있다. 못생긴 여자에게 남자가 생긴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러나 방긋 웃는 호박꽃은 밉지 않고, 마음 착한 새댁으로 보인다. 전날 비가 내려서인지 청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 호박 덩굴 속으로 들어간다. ‘호박에 청개구리 뛰어오르듯 한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청개구리가 주제도 모르고 호박꽃을 바라본다는 뜻이 아닐까싶다.

길가에 늘어진 호박잎을 만져본다. 누런 큰 잎이 거칠다. 뒷면은 예상대로 꺼끌꺼끌하다. 한여름 무더위를 온몸으로 이기느라 억세진 것이 아닐까. 잎사귀 만진 손을 코에 대본다. 호박 냄새가 짙은 향기로 다가온다. 잎과 줄기, 꽃과 열매가 같이해야 호박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호박이 열매만 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떠한가. 머리, 몸통, 팔, 다리가 합쳐 한 생명체를 만든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이름을 갖고 주변 사람의 손길 속에 자란다. 나의 신체 중 일부분이 없다면 과연 정상적인 내가 되었을까. 문득 내 이름으로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준 모든 신체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뿐인가. 인간은 교육이라는 어려움을 뚫고 성인이 된다. 애면글면 부모가 되기까지 힘든 시간을 보낸다. 호박꽃 또한, 덩굴 속에서 꽃피우고 열매가 맺기까지 고행의 길을 가지 않는가. 인간과 무엇이 다르랴.

‘옛날 한 스님이 황금 범종을 만들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성금을 모았다. 모은 성금으로 범종을 만들려다 병이 들어 숨을 거두었다. 저승으로 간 스님은 부처님께 만들려다 만 범종을 완성하게 인간 세상으로 보내 달라고 애원하였다. 부처님의 가피로 사바세계로 돌아왔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 자기가 살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실망하여 바위에 앉아 있던 스님은 범종과 똑같은 황금색 꽃을 발견했다. 꽃의 뿌리까지 파 보았더니, 스님이 만들다가 미완성이 된 황금 범종이 묻혀 있었다. 황금 범종과 꼭 닮은 그 꽃이 호박꽃이었다.’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호박꽃은 범종처럼 통꽃으로 피어 모든 것을 관대하게 포용한다. 꽃말은 ‘사랑의 용기’이다. 호박꽃은 한 덩굴에 사이좋게 암꽃과 수꽃이 같이 핀다. 꽃가루받이는 벌과 나비의 몫이다. 때로는 사람이 수꽃을 따서, 암술머리에 묻혀 주기도 한다. 수꽃은 황금 범종 모양으로 활짝 피었다가, 소리 없이 떨어지며 부음을 알려준다. 암꽃은 꽃받침 아래 씨방이 자라 호박이 된다. 호박이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은 장한 일을 해내는 여인으로 간절하다.

호박으로 만드는 음식을 떠올린다. 호박전, 호박나물, 호박떡, 호박죽 등 다양하다. 그 옛날 어머니가 해 주시던 호박꽃 만두도 있다. 만두는 호박 수꽃을 따다가, 만두를 빚어 꽃 속에 넣어 살짝 찐다. 호박꽃은 노란색에 초록이 곁 드린 아름다운 만두가 된다. 연한 호박잎은 골라 호박잎 뒷면 줄기의 거친 부분을 벗겨 밥 지을 때 살짝 얹는다. 따끈하게 쪄진 호박잎에서 풋풋하게 살아온 삶의 감칠맛이 흐른다. 호박순은 호박잎과 함께 된장에 넣으면 깔끔한 맛의 된장찌개로 마뜩하다. 이처럼 호박꽃 인생은 호박이 되기까지 버릴 것이 없는 진심이다. 아슴아슴한 기억으로, 할머니와 만들던 호박떡이 그립다. “어서 좀 드우. 덥혀 내오려다 호박떡은 더워선 더워 맛이요, 차선 찬맛이란다길래….” 채만식 소설 <여인전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처럼 호박떡은 더우나 차나 제 맛이 일품이다.

호박꽃에 달린 호박은 초록색인데 어찌 호박꽃은 노랗게 필까 엉뚱한 질문을 던져본다. 전설처럼 값나가는 황금 범종을 닮으려고 노란색인가, 아니면 벌과 나비를 부르려고 단장을 했나. 호박이 자라 나눔의 먹을거리가 되기까지 호박꽃은 덩굴 속에서 위무하며 힘든 시간을 보낸다. 늦가을이 되면 오달지게 누런 황금빛을 자랑하는 호박이 된다. 누런 호박은 임산부와 산모를 건강하게 해준다. 호박씨는 이듬해 다시 태어나 덩굴을 타고 오르며, 호박꽃 참 인생의 나팔을 분다.

호박꽃은 인간에게 더 없이 모든 것을 나누어 주고 있지 않은가. 이는 장한 상을 받을 일이다. ‘호박은 늙을수록 달다.’고 한다. 황혼기가 된 나를 돌아본다. 늙은 호박처럼 나눔으로 달달한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이 더없는 호박꽃 참 인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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