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해 시인

이인해 시인
이인해 시인

[동양일보]나는 패랭이꽃을 좋아한다. 꽃 중에 딱 한 가지만 골라보라고 하면.

고향이 초가 셋집이 살던 그림 같은 조그만 마을이라 이 꽃은 길가에서도 흔히 보았다.

6월에서 8월까지 길가 메마른 땅에서 개망초꽃, 달개비꽃 민들레 같은 꽃들과 잘 어울려서 핀다. 6, 25 나던 다음 해 6월 회갑을 막 지내신 조부님께서 돌아가셨다. 아침저녁으로 구연 상에 멧밥을 올리고 술을 부어 놓았다. 그리고 주둥이가 좀 넓은 백자 술병에 야생화를 꺾어 꽂아놓았는데 대부분이 패랭이꽃이었다. 아마 피는 시기가 그때여서 그랬을 것이다. 3년 상을 치른 후 할아버지 산소에 가니 패랭이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어서 이 무슨 연고일까 생각했다.

참 신기했고 그때부터 패랭이꽃이 내 명상의 세계에 자릴 잡게 되었나 보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자주 보고 생각하니 더 예뻐 보인 것일까? ‘패랭이’라는 명사를 왜 꽃 이름으로 정 했나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가 청주 5일 장에 가실 때 여름이면 가끔 갓 대신 쓰고 가신 게 패랭이였다는 게 생각난다. 대나무를 실처럼 가늘게 다듬어 엮어서 술독에 박는 용수처럼 삐쭉하게 한 다음 모자 테를 만들어 붙이고 끈을 달아 갓처럼 턱에 매는 착용법이 고전적인 모자다. 꽃잎이 판판하게 펼쳐진 그 모습과 패랭이 모자 테가 수평으로 펼쳐진 게 똑같았기 때문에 불러들인 이름임이 틀림없다.

대개 패랭이는 재실 집에 사는 산지기들이 상여나 가마를 멜 때 쓰곤 했는데 왜 할아버지께서 갓을 놔두고 그걸 쓰고 읍내 장엘 가셨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시원하고 활동이 편하셔서 그랬을 것 같다. 할아버지가 장에 가실 때 쓰셨던 패랭이와 이상한 은유적 상통이 놀랍도록 자연스러워 꽃을 보면 할아버지 장에 가시던 모습이 그냥 떠오른다. 그리고 널따란 구연 상 위에 분향하고 시들면 다시 꺾어다 꽂던 붉은 그 꽃이 6월 되면 더욱 생각난다. 이 꽃은 줄기 모양새가 비슷하면서도 꽃은 색이 많이 다르고 꽃잎 모양도 다양한 수입종 패랭이꽃들이 시중에 많지만 나는 산에 들에 제맘대로 피는 우리나라 자연산의 붉은 패랭이꽃이 제일 좋다.

모든 꽃들은 은밀하게 꽃방을 가지고 있어서 향기를 생성시키고 꽃가루를 만들어 벌을 불러 생육의 비밀을 지닌다. 호박꽃이 그렇고 백합꽃, 메꽃 등등 은밀한 사랑의 비밀을 가지는데

패랭이꽃은 조금은 싱거울 정도로 자신의 속을 거침없이 열어 놓는다. 그렇다고 천박한 모습이거나 애처로운 모습이 아니고 옛날에 들일 나가던 맨발의 시골 처녀처럼 순수하다.

유명한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이 쓴 '봄봄'이라는 참 웃기는 소설이 있다. 데릴사위로 들인 총각이 색시감과 함께 혼례를 올리고 살고 싶어 하는데 딸만 여럿 낳은 욕심쟁이 장인은 그걸 이용해 부려 먹으려는 데서 심한 갈등을 일으키고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거기 색시가 될 처녀의 모습이 꼭 패랭이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처녀 이름이 점순이였던 것 같다. 점순이는 논갈이하는 예비 신랑 총각에게 밥을 내다 주느라 광주리를 이고 논둑으로 밭둑으로 풀밭을 걸어갔을 것이고 논갈이하는 시기가 한참 패랭이꽃 피는 시기 아닌가? 점순이는 미리부터 총각에게 화가 나 있다. “왜 성혼을 시켜 달라지 못하고 만날 죽어라 바보처럼 일만 하느냐?” 밥 광주리를 받는 총각이나 처녀 점순이나 만날 말다툼을 하지만 모두 털털하고 거리낌 없고 그러나 한 가닥 순수의 색깔만은 붉디붉은 패랭이 꽃잎의 색깔이 아닐까?

내년 6월에는 패랭이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골길을 한참 걸어보고 싶다. 요즘은 보기 힘든 그렇게 순수한 점순이 처녀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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