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송보영 수필가

[동양일보]새벽이 열리는 시간 고샅으로 나선다. 처음 온 길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다. 작은 길을 되돌아 나와 이웃하고 있는 또 다른 고샅을 걷고 좀 전에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다. 몇 번을 되풀이해 걸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왜였을까.

저물녘 예약된 숙소로 가기 위해 낯선 동네 앞 작은 길을 지나려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고샅길이 마음을 흔들어 댔다. 오래된 기억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어릴 적 내 삶의 언저리에서 보았던 사람 사는 이야기들로 가득할 것 같은 고샅을 걸어보고 싶어 밤잠을 설쳤다. 얼기설기 되는대로 쌓은 것 같으면서도 단단히 결속돼 있으면서 수십 년을 살아 낸 돌담들이 품고 있는 숱한 삶의 소리가 듣고 싶었다. 온몸을 돌담에 기댄 채 고샅과 이웃하며 살아가는 담쟁이들의 이야기도 궁금했다.

야트막한 집들이 오순도순 정다워 보이는 마을을 품고 있는 이 고샅은 오래전 누군가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나 그들의 일상을 품고 숱한 날들을 함께 살았을 게다. 처음 고샅이 생겨났을 때는 질퍽질퍽했을 고샅길이 점차 야물어 감과 더불어 골목 안을 누비던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차고 매끄러운 겨울날 군불 때는 연기가 자우룩할 때면 휘돌던 냇내. 밥 뜸 들이는 냄새. 장 지지는 냄새 같은 것들로 정다웠으리라. 이와 더불어 오고 가는 세월 따라 생로병사에서 빚어지는 환희와 눈물이 겹겹이 쌓여 있으리라.

쉼 없이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에 다져져 더욱 야물어지고 단단해졌을 고샅. 깊어 가는 계절을 따라 농익은 붉은 담쟁이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까지도 품어 안았을 고샅. 고샅은 그리움이다. 기억의 아득한 곳에 잠재해 있던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소환되어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게 하고, 오늘을 살아내느라 지친 마음을 다독여 주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살이가 시작되면서 생겨난 물리적인 고샅이 있다면 우리네 가슴 안에도 고샅 몇 개쯤은 존재할 터. 내 안의 고샅에도 긴 날들을 살아온 삶의 궤적들이 제 이야기만큼의 길을 내고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부모 형제들과 복닥거리며 보낸 날의 흔적들. 아이들을 키우면서 환희와 눈물로 가득했던 기억들. 오래된 것들임에도 삭아지지 못해 야문 돌덩이가 된 상처들. 풋콩처럼 싱그러웠던 젊은 날 또래들끼리 모여 밤 가는 줄 모르고 세상이 불합리하다고 목청을 돋우던 어쭙잖은 기억들. 올바른 가치관의 부재로 삶의 목표를 바로 설정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던 흔적들. 때에 따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발아發芽 했으나 이내 시들어 버린 꿈의 편린들로 가득하다.

사소하면서도 아름답고 슬픈 삶의 흔적들이 있는 내 안의 고샅을 보니 혈기 왕성하던 시절 별것 아닌 일에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을 내며 설왕설래하던 모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다변화할 줄 모르고, 인간의 수명이 이렇게 길 줄 모르고 현실에 안주하며 스스로를 개발하는데 전력을 다하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이 머무는 고샅에 닳으니 여전히 아프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내 모습은 이들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숙연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시간과 삶의 행태에 따라 나름의 궤적을 남긴다. 후세를 살아가는 이들은 그들이 남긴 흔적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내게 주어진 인생을 내 의도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내 부모의 인생도, 내 후세 아이들의 삶도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고샅은 기억의 저장고다. 오래전 지난 일도 기억하고,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품을 것이다. 그리 살아내다 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쌓여가고 정든 고샅이 그리워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들이 잊고 있었던 오래된 이야기를 돌려주며 함께 울고 웃을 거다.

나를 설레게 했던 고샅의 끝에는 야트막한 산등성이들이 있고 그곳에는 야생녹차밭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히 고샅을 오르내리며 차밭을 가꿀 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향기 나는 차를 만들기 위해 찻잎을 따고 덖을 터이다. 그들과 더불어 고샅은 더욱 단단해져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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