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영 시인

 

[동양일보]살아온 생의 반 이상을 고향 떠나 낯선 도시 포항에서 살았다. 먼 외국이라면 상황이 달랐기에 생각도 달랐을 것이다. 외국처럼 먼 곳도 아닌 우리나라 남쪽 포항으로 갔을 땐 오늘의 상황과 많이 달랐다.

하재영 시인
하재영 시인

교통뿐만 아니라 통신 시설도 지금처럼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차츰 고향은 멀리 있고 낯선 도시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게 1987년 서른 살 때였다. 옮겨 심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서 몸살을 앓듯이 객지에 자리를 잡으면서 나 역시 그러했다. 더욱이 고향 사람과의 관계는 거리만큼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맘까지 멀어지기 시작했다. 교통이 편리하면 바로 달려올 수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포항에서 고향집까지 이동하기 위해서는 서너 번 이상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고, 이동시간도 5시간 이상 걸렸다. 볼 것 많고, 먹을 것 풍부한 포항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포항살이는 고향 이상으로 정이 들기 시작했다.

은퇴 몇 년 전 포항살이가 고향에서 살았던 서른 해보다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은퇴 후 어디서 살 것인가?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사는 문제보다 어디서 살 것이란 문제가 화두로 꼬리를 물었다. 정붙이고 살던 포항은 이미 고향처럼 따뜻했고, 벗도 많아졌고, 살림도 살만해졌기 때문이다.

결정의 중심에는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님이었다. 장남으로서 객지서 직장 생활한다고 소홀했던 효도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지만 어머님은 포항으로 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모실 수 없는 상태에서 뾰족한 수는 어머니 곁으로 내가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어머님 계신 고향으로 인생 후반의 방향을 틀게 되었다.

인생살이란 것이 옛 어른들 말씀대로였다. 새집을 짓고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하려 하였더니 당신께서 먼 길 떠나신 것이다. 황당했지만 받아들여야했다. 고향은 변하고 어머니는 내 곁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사 후 새롭게 적응해야 했다. 모든 것이 익숙한 것 같았지만 삼십년 이상 멀리 있던 고향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어디를 찾아갈 때 만나는 낯선 풍경은 나를 당황시킬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말투도 충청도 말씨에서 경상도 억양이 조금 몸에 배여 있는 상태였다. 이웃과 대화하다보면 고향이 경상도냐고 묻기까지 한다.

새로운 환경에 따른 멀미가 왔다. 장거리 항해로 배를 오래 탄 사람이 뭍에 내렸을 때 느끼는 땅멀미 같은 증세였다. 적응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했다. 긍정적인 맘으로 고독을 즐기면서 책을 가까이 하는 일이 우선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그 내면에 머문 고독을 버릴 수는 없다. 고독은 신의 은총이다. 책을 가까이 하는 일이 고독을 즐기며 새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고,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사는 일이라 믿었다. 오늘도 익숙한 것 같은, 하지만 익숙하지 않는 고향의 풍경을 만나며 책을 넘긴다. 그리고 책속의 길을 짚어보며 석양에 머문 고독을 사랑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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