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형 한국문인협회 홍성군지부 감사

이준형 시인

[동양일보]내 고향은 오서산이 서쪽으로 천수만을 바라보는 물 잘 나오는 정전리 중 평전이라 불리는 논밭 가운데 몇 가구가 모여 사는 동네였다. 십리 길 안에 큰 산도 있고 바다도 있는 촌인데 면 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를 검은 고무신에 책보를 메고 바지저고리 입었던 친구들과 함께 걸어 다녔다.

등잔불 아래 방바닥에서 공부하고, 라디오가 없어 아침에는 새마을 노래, 정오에는 예비군가가 흘러나오던 유선방송 스피커를 듣고 살았다. 학교 방과 후 친구들과 신작로 옆 동산에 올라가 진달래 따 먹고 아카시아꽃 필 무렵이면 개울 옆 둑길에서 아카시아 꽃잎 훑어 먹으면서 학교에서 빈 도시락에 나누어주던 강냉이죽이나 밀가루빵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허전한 배를 달래기도 하였다.

으흠 흠! 잔기침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할아버지께서는 대여섯 모금이면 다 타서 다시 잘게 썰어놓은 담배를 장죽 꾹꾹 눌러 재우고 불을 붙인다. 서너 대를 연이어 피우고 담배쌈지를 묶는다. 삼대독자인데 돌이 갓 지나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일제 강점기에 친인척 없이 혼자 살아가기 힘들었을 텐데 할머니를 만나 열 한 남매의 자녀를 열 한 명을 두셨다.

숫돌에 날을 세운 낫을 얹은 지게를 지고 오서산 질마재 쪽 국유림으로 올라가 나무 한 짐을 만들어 내려오는 것이 하루 일이다. 태어나면 다 자기의 먹을 식량은 타고 나오는 거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시곤 했지만 열 한 남매를 키우는 것이 만만치는 않았을 것은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려면 학교 가지 말고 나무나 해 와라 라는 말씀에 책보를 담 너머로 던져놓고 지게를 지고 대문을 나가 책보를 들고 학교로 뛰었다는 우리 아버지의 옛날이야기에서 증언이 되었다.

대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았으니 이런저런 다툼 등이 발생했을 것이고 간섭을 하면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니 입을 다물기 시작했을 것이다. 무뚝뚝하고 일 외에는 말씀을 안 하시는 전형적 농촌의 가난한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의 직업 관계로 대가족이 모여 살던 집을 떠나 네 식구만 인근 읍소재지로 이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등이 있는 지역이라서 좋기는 하지만 친구들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시무룩해 있던 초등학교 삼학년 어느 봄날. 할아버지는 여전히 서너 대의 쌈지 담배를 피우고는 지게를 지고 대문을 나섰다.

내일 아침에는 소달구지에 짐을 실어야 한다며 이것저것 세간살이 나누어 보따리를 싸던 점심을 지난 나른한 시간. 한껏 올린 나뭇짐을 진 할아버지가 대문을 들어와 헛간 쪽에 지게를 내려놓으신다, 평소엔 지게를 진 상태에서 바로 나무를 부리는데 그날은 조심스레 작대기를 바치고 지게 뒤에서 진달래 한 묶음을 꺼내어 “전학을 가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시면서 내게 내미셨다.

설빔이 받아 본 선물 전부인데 우리 할아버지가 진달래 한 묶음을 나에게만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때는 보잘것없이 하찮은 선물이라서 받긴 받았지만 별 감동이 없었던 한 다발 진달래꽃. 내가 곧 그때 할아버지 나이가 될 터인데 올해 봄에는 더욱 구릿빛 얼굴에 울퉁불퉁했던 할아버지의 손에서 나왔던 진달래를 다시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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