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섭 수필가

김규섭 수필가

[동양일보]깨달으면 속세도 정토가 되고 깨닫지 못하면 정토도 속세가 된다고 했던가. 대청댐을 지나 새소리, 바람 소리, 시원한 솔 향기를 도반 삼아 타박타박 산길을 오르면 높이 솟은 석축 위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천년고찰 월리사를 만난다.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암자의 면면이 이곳에서 기도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을 닮아 그저 소박하다.

온화한 미소로 숱한 중생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을 천년세월.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첩첩산중 이곳에 올라 머리를 숙였던 그 옛날 사람들은 어떤 위로와 가르침을 얻고 돌아갔을까. 그들이 흘리는 눈물과 한숨, 그리고 간절한 기도를 말없이 들어주는 이가 있어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지 않았을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분명 삶의 큰 낙이요, 행복이다.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금강경 한 구절을 가슴에 새기며 법당 안을 들어서니 부처님이 넉넉한 품으로 맞아주신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이 먼 길을 찾아왔는가. 그윽한 눈길로 보내는 무언의 목소리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이 세상 무엇하나 변하지 않는 것 없으니 세상은 고통의 바다가 아니던가. 무상한 세속의 삶에 힘들어하는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 머물며 자비의 손길을 내밀고 계시리라.

대웅전 옆 삼성각. 전각의 현판은 그저 이름일 뿐, 이곳에 성인이 어찌 세 분만 계시겠는가.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곳을 거쳐 간 이름 남기지 않은 선지식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부채를 든 산신의 모습에서 선시 한 수를 떠올려본다. “오색구름 아래 신선이 나타나 손에 든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신선 얼굴 본 사람 아무도 없으니 부채는 보지 말지어다.” 부채에 눈과 마음을 빼앗겨 정작 신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이가 중생이라면 그 무엇에도 현혹되지 않고 만물의 참모습을 보는 이가 선지식 아니겠는가.

순수하고 꾸밈없는 봄 햇살이 절 마당에 가득하다. 저 멀리 목련나무 그늘 아래 여백처럼 서 있는 요사체 하나. 오래된 옷을 입고 있으나 덧칠하지 않았다. 기둥은 수수하면서도 기품있는 여염집 주인처럼 곱게 늙어가고 있다. 이곳에는 새것도, 헌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음자리 돌아보니 작은 욕심 하나 내려놓지 못하던 그 마음이 번뇌의 시작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세속에 굽은 우리네 마음도 언젠가는 깨달음의 기둥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침묵의 바람이 가슴으로 불어온다.

아무도 없는 작은 암자, 스님 혼자서 채마밭을 가꾸신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란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일이 곧 마음공부임을 스님은 잘 알고 계신다. 풀 한 포기 다듬는 손길에 정성을 다하는 일, 스님에겐 그것만이 이 순간 화두이고 수행이다. 깨달음의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끓어오르는 번뇌의 바다 앞에서 마음을 살피고, 세상을 살피는 길. 그 길을 걷기 위해 부단히 하심(下心)한다. 수행과 삶이 하나인 이곳에서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더욱더 생생하게 피어오른다.

멀리 아득히 바라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산이 깊어 구름마저도 쉬어가는 곳. 애써 화려하거나 아름다워지려는 흔적이 없어 더 정감이 가는 곳. 가끔은 오랜 세월 속에서도 모자란 듯 비어있는 천년고찰 월리사와 마주해보자. 그리고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앞산에서 쉬어가는 구름이 고요히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마르면 마른 대로, 젖으면 젓은 대로 지친 걸음 감싸주는 소박한 오솔길. 새것만을 쫓는 세상을 벗어나 월리사를 찾아가는 길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이자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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