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지하 시인 영전에서 떠올리는 몇 기억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이팝나무 꽃이 흐드러진 길을 가다 김지하 시인의 별세 소식을 받았다.

‘천하의 김지하’가 죽다니. 1년간을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장남 내외가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을 했단다. 세상에, 천하의 김지하가 죽어? 그토록 모진 고문도 견뎌내던 그 질긴 목숨이 병마를 못 이기고 끝내 이승을 떠나다니.

대학 졸업을 몇 개월 앞두고 있을 때, 아껴 주시던 유재천 박사(당시 한국신문연구소 연구원· 전 한림대총장)께서 소개해 줄 친구가 있으니 서울 명동의 ‘은성주점’(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서 만나자 하셨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시인 묵객들이 안방처럼 드나들던 곳. 유 박사님은 청주에서 온 촌닭(?)앞에 나타난 깡마른 청년을 소개했다. “내 대학 후배인데 시를 쓰고 있네. 본명은 김영일이고, 필명은 김지하야.” 염색한 군 작업복의 광대뼈가 높은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다면서도 막걸리 몇 잔을 거뜬히 비웠다. 유 박사님은 “앞으로 좋은 친구들이 될 테니 자주 만나게나”라며 자리를 떴다. 우리는 취기가 돌자 초면임을 잊고 이런 저런 대화로 두어 시간을 보냈다. 그 후, 몇 차례 안부 전화와 편지가 오갔고 나는 졸업을 했다. 11월에 입영 영장을 받아놓고 있었는데 제안이 왔다. ‘의식이 있는 잡지를 내려는데 함께하자’는. 나는 함께 하고 싶었으나 입영 때문에 포기했다. 해를 넘기고 육군 일등병이 되어 낮에는 훈련에, 밤에는 불침번에 시달릴 때 김지하 등 몇 명이 주도하던 잡지 <다리>지 사건이 터졌고, 모조리 구속되었다. 군사정권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내가 입영하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구속자 명단에 끼었을 것이었다.

그 이후 김지하는 시 ‘오적’(五賊)발표부터 반체제 시인으로 수배~연행~고문~구속~복역 등 수난의 세월이 이어졌다.

당국의 언론검열과 뒷조사에 오기(傲氣)만 충만했던 기자 시절. 어느 이슥한 밤 마지막 기사를 정리하는데 전화가 왔다.

“나요. 김지하…”

순간, 최근 현상수배 중임이 떠올랐고, 지금 와 있다는 상당공원 희미한 벤치에 냅색 하나도 없이 앉아있었다. 손등과 얼굴에 상처가 확연했다. 검문이 심해 산길로 오느라 입은 상처란다. 초췌하고 누적된 피로 때문에 몹시 지쳐 있었다. 우선 잠을 재워야겠는데 갈 곳이 없었다. 궁리 끝에 조성훈 선배(당시 충북적십자사 청소년 과장·전 충북적십자사회장)께 전화를 했다. “듣고만 계십시오. 김지하 시인이 옆에 있습니다. 적십자사 숙직실 당직을 들어가게 하고 우리가 하룻밤 묵었으면 합니다.” 먼발치에서 숙직실 쪽을 보니 당직자가 나가는 것이 보였고, 조 선배가 택시로 달려 왔다. 그날 밤 그는 얼마나 곤하게 자는지 나와 조 선배가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에도 잠을 깨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간, 나는 은밀한 몇 곳을 전전시키며 건강을 추스르게 했다. 사흘만인가? 현대극장 뒤 작은 주점 뒷방에서 술 한 잔을 하는데 소설가 남정현 선생을 뵈었으면 좋겠단다. ‘분지’(糞地)소설로 구속되었다 나온 남 선생은 전화를 받자마자 청주로 내려와 둘은 얼싸안고 좋아했다.

그날 저녁 술자리는 김지하 리사이틀이었다. 얼마나 많은 노래를 구성지게 잘도 부르는지 거의 날이 샐 때까지 젓가락 장단을 쳐 가며 한을 풀 듯 노래를 했다. 그러면서 간간히 “조형-우리 좋은 때 오면 유랑극단을 만들어 마을마다 다니며 풍악을 울립시다”며 다짐을 하곤 했다. 나도 그 꿈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채지만, 시대를 맞서 저항하던 거인은 80을 넘기자 마자 훌쩍 떠나고 말았다. 그 때 의기투합했던 나는 50년이 넘도록 젊은 기자들을 타박하며 신문만 만들고 있으니, 수년을 연락조차 못하고 살아 왔음이 송구스러울 뿐이다.

생각하면 거침없이 말하고, 쓰고, 행동에 옮겼던 이 시대 큰 시인 김지하, 그를 말없이 숨겨주었던 조성훈 선배도 이미 떠났고, 그가 밤새워 ‘두만강 푸른 물에~’ 를 구성지게 부르던 그 주점들 자리엔 추억도 헤아리지 못하는 빌딩이 들어선지 오래다.

우리 시대의 전설 김지하 형-

이젠 쫓기지 않고, 병마도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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