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송보영 수필가

[동양일보]햇살이 곱다. 봄 산이 청정하다. 눈바람을 맞으며 모진 고독을 견뎌낸 검푸른 나목들 위에 돋아나기 시작한 여린 잎들의 수런대는 소리로 가득하다. 물오른 산 벚나무도 봄이 부르는 소리에 화답하며 꽃을 피웠다. 텅 비어 허허로웠던 산야가 부드럽고 여린 색을 입어 오색구름으로 피어나는 중이다. 생명이 움트면서 토해내는 소리 들이 잠자는 심령들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봄의 품성은 어떤 것일까. 봄은 바람을 데리고 빛으로 온다. 봄의 빛깔은 찬란하다 못해 영롱하다. 단단한 것들을 헐겁게 하고 닫혔던 빗장을 열게 한다. 소멸과 생성 사이를 오가면서 소멸의 반환점을 돌아 언제나 생성의 중심에 서 있다. 봄 햇살 앞에 서면 무디어졌던 감성이 깨어나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심장을 통해 흐르는 혈류들의 움직임이 활발해 짐으로 심장 박동 수가 늘어난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이 토해내는 열기로 세상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내게도 봄이 왔다. 창문을 활짝 연다. 스멀스멀 기어드는 봄 햇살과 여린 바람이 실어다 준 향기가 오감을 흔들어 깨운다. 분주한 일상을 내려놓고 휴식에 든다. 꽃차를 우린다. 꽃잎을 담은 찻잔에 차를 우리기에 알맞은 물을 가만가만 붓자 꽃잎이 활짝 피어난다. 순도 백 퍼센트의 물이 색을 입고 향기를 머금어 새롭게 빚어졌다. 향기를 마시고 색을 마신다. 내 안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피어나는 꽃을 따라 봄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봄의 정점에서 나와 함께 했던 봄날들을 생각한다. 그동안 수많은 봄이 내 안을 통과하며 지나갔다.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여섯 개의 구멍인 눈, 코, 잎, 귀, 배설 통로를 통해, 보고 듣고 숨 쉬고 먹고 쏟아내며 여기까지 왔다.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 때문에 너무 많이 보고 들으며 먹어 치운 탓에 소화불량에 걸려 심한 체증을 앓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봄날의 한 때를 실속 없이 어슬렁대느라 영양실조에 걸려 허둥댄 적도 많았다.

지금 나는 수많은 봄날을 보내고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여기 서 있다. 내 안의 모든 구멍은 항상 제 몫을 다 할 줄로 알았다.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을 미처 몰랐다. 지금은 소화불량에 걸려도 좋으니 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기관이 제 소임을 다 함으로 주린 영혼을 채우고 싶지만 이제 그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 심령이 갈渴한 상태로 허둥거리고 있다. 감성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해, 보아도 본 것 같지 않고 들어도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찬란한 이 봄이 주는 메시지에 감동해 눈물 한 바가지 펑펑 쏟고 싶다. 오감이 모두 깨어나 깊은숨을 쉼으로 심한 열병을 앓고 싶어 전율한다.

순간 또 하나의 내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며 몸의 소리를 들으라 한다. 조금은 어눌해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쓸만하지 않느냐며 위로한다. 과욕은 금물이라며 이 순간 느낄 수 있고 보이는 것들만 보라 한다. 허겁지겁 먹어치우다 보면 심한 소화불량에 걸려 회복 불가능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제는 몸이 보내는 경고장을 겸허히 받아들여 몸과 마음이 함께 가야 할 때라고 채근한다.

바람이 분다. 꽃잎이 시나브로 나부낀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봄날이 가고 있다. 차 한 잔의 여유 속을 넘나들며 봄으로의 여행을 떠났던 내 마음도 제 자리로 돌아와 안주한다. 백화점 쇼윈도에 걸려있는 보랏빛 실크 원피스에 빼앗겼던 마음도 불러들이고,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며 안타까움에 저렸던 가슴도 가라앉힌다. 세상의 소리에 지나치게 민감해 짓물렀던 귀도 봄 햇살에 널어 진물이 흐르지 않게 보슬보슬 말린다. 젊었던 날 내게 왔던 봄날이 뜨거운 열정으로 뒤범벅이 된 혼돈의 날들이었다면, 지금 내게 와준 봄날은 속 깊은 울음의 뜻을 알아가는 성숙 된 봄날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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