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충옥 괴산고 행정실장

류충옥 괴산고 행정실장

[동양일보]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외로움이란 짐을 견디는 무게일지 모른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이름이 하나씩 사라져가고, 동생들도 먼저 떠나 주변에 또래가 별로 없는 외로움을 올해 92세이신 아버지를 곁에서 보면서 실감하게 된다.

출퇴근 거리가 1시간 이상 되다 보니 피로도가 심하여, 30분 남짓 거리의 친정에서 다니고 있다. 친정에는 아버지께서 혼자 사신다. 어머니가 2010년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아버지는 주방에 처음 발을 디디셨다. 육 남매가 주말마다 돌아가며 들러서 반찬을 만들어 놓고 국을 끓여 놓으면 아버지가 밥을 하시고 반찬을 챙겨서 어머니와 드시곤 하셨다. 그마저도 어머니가 한 5년간 노인병원과 요양원에 오가며 생사를 헤매실 때부터는 혼자 빈 집을 지키고 사셨다.

퇴근 후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 아버지는 종종 옛날이야기를 꺼내놓으신다. 초기 치매가 와서 금방 한 일이나 이야기도 잊으시고 매번 처음 하는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나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맞장구를 쳐 드린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서 반주로 소주도 한 잔씩 곁들이신다.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셨다. 외갓집에 가서 몇 년 살면서 소학교를 조금 다니시다가, 본가로 와서는 서당을 조금 다니시며 천자문과 한글을 깨치셨다. 가난으로 못 배운 것이 한이 맺혀 자식만큼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치겠다고 결심하셨단다. 지금이야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이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배움의 길이 열려있지만,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배움이 길은 오직 학교였고 언니들은 초등학교도 공납금을 내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마치고 동네에서 농사일하던가 공장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딸들은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돈 벌어서 오빠나 남동생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라고 희생을 강요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버지께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일이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아들딸 구별하지 않고 모두 고등학교 이상 학교를 보낸 것이다. 동네 친구가 “시집보내면 남의 식구 되는 딸자식을 왜 빚을 져가며 가르치느라 고생하냐?”고 했다가 아버지와 크게 싸우신 적이 있으시다고 한다. 당신은 비록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으시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으신 앞서가는 부모님이셨다.

아버지는 비록 많이는 못 배우셨지만, 필체가 좋으셔서 마을의 집이나 회관을 지을 때 대들보 위에 쓰는 상량문(上梁文)은 늘 아버지가 쓰셨다고 한다. 동네 어르신들은 편지가 오면 으레 우리 집으로 가져왔고, 아버지께서 읽어주시는 것을 어린 시절 자주 보았다. 서당을 다니셨기에 천자문을 배워 한자를 아시니 동네 사람들 일도 많이 도와주시고 직접 다니시며 해결해 주셨다. 이장 등 동네일을 맡으시면서 전기도 다른 동네보다 빨리 설치하였다고 한다. 밤이면 호롱불 아래에 모여앉아서 책도 보고 이야기도 하곤 했는데 마을에 전기가 들어와 얼마나 눈부시던지 그때의 놀라움이 다시금 떠 오른다.

비록 가난했지만, 책임감과 열정 가득한 아버지와 사랑 많고 성실한 어머니, 그리고 육 남매나 되는 착한 언니 오빠가 있었기에 어린 시절 난 늘 우리 집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땅 한 평도 없는 빈털터리 맨주먹이지만, 자식만큼은 가난을 물려주기 싫어서 교육을 통해 제 길을 찾게 해주신 아버지가 너무도 감사하다.

가게 하나 없는 산속 마을엔 온종일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적막하다. 어릴 적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다섯 가구 정도 남은 빈 동네는 오늘도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밤이면 소쩍새 울음소리, 개구리 소리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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