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환 수필가

양미환 수필가

[동양일보] 혼자 사는 집은 늘 적막하다. 침묵만이 시간과 긴 싸움을 한다. 침묵이 시간과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면 나는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 눈의 피로가 극에 달하면 조용히 눈을 감고 사색을 즐긴다. 온몸을 감싸며 무섭게 밀려오는 적막감은 두려움이 되기도 하고 때로 눈물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처지는 감정을 막기 위해 텔레비전을 켜고 그 소리가 집안에 울리도록 한다.

그날도 혼자 떠들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마음을 적셨다. 반짝이는 별빛아래 소곤소곤 소근 대던 그날 밤~ 하고 시작하는 노래는 무너진 사랑 탑 이라는 오래 된 노래다. 아버지가 어린 나를 앞에 앉혀놓고 주먹을 모아 쥐고 어깨를 틀은 자세로 다리 한쪽은 약간 구부리고 한쪽 발로는 장단을 맞추며 애절하게 부르던 노래다. 수준 높은 노래실력을 가졌던 아버지는 한 많은 생을 마감한지 삼십 년도 훨씬 넘었다. 그러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모습은 생생하게 지워지지 않고 떠올라 늙은 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도 많이 들은 노래라 음치인 나도 흥얼거리면 언제나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며 늘 타박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마음에 사진처럼 박아 놓은 장면들은 죽음으로도 지워지지 않고 노래가 나오면 자동으로 센서가 켜지고 재생되는 순환을 반복한다. 노래뿐이 아니다.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들은 바쁘게 살다가도 어느 장소나 음식, 물건, 또 사람에게서 무시로 떠오른다. 무시로 떠오르는 생각들은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가슴에 묻기를 반복하며 우리는 생을 이어간다. 아버지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살아내고 있는 늙은 딸에게 삼십 년도 더 지난 아버지의 죽음은 그래서 끝이 아니다. 물리적 모습은 사라졌어도 그 모습을 기억하는 누군가로 인해 영혼은 생기를 얻고 생을 이어간다.

직장 때문에 집을 떠나 생활하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어느 날이었다. 냉장고를 열고 냉동실 물건들을 뒤적이며 버릴 것들을 확인한다. 그렇게 뒤적이던 맨 밑바닥에서 아무렇게나 넣어 둔 티가 역력한 비닐붕지 하나가 손에 잡힌다. 비닐봉지 하나를 손에 들고 어느 새 눈가는 젖어 온다.

비닐봉지에는 오래 전 동창인 친구가 직접 꺾어서 말려 준 고사리가 말라 버릴 대로 마른 상태로 담겨있었다. 고사리를 꺾으러 다닐 때 친구는 암 판정을 받은 후였다. 운동을 핑계로 산을 오르며 고사리를 꺾었다. 고사리를 잘 말려서 그가 생전 마지막 동창회를 하던 날 조금씩 비빌봉지에 담아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는 혼자살기도 하지만 해 먹을 줄도 모를 것 같아 조금만 담았다고 말하며 건네던 모습이 또 다시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후 몇 달이 지나고 친구는 생을 다했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동창인 우리 모두는 고사리 이야기를 하며 그를 보내 주었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을 알고 있던 친구는 산에 올라 고사리를 꺾으며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는가! 남몰래 깊은 산속에 그가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인간으로서 흘렸을 눈물을 산은 알고 있을까? 고사리를 꺾으며 살고 싶었을 그의 열망이 그대로 전해진다. 강을 건너 배를 타고 학교를 다니던 그에게 철없는 열세 살 소녀는 촌놈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때마다 말없이 빙그레 웃던 웃음 또한 내가 죽기 전 무시로 소환될 그리움이다.

봄이 되고 고사리가 나오면 친구는 반드시 내 기억에 소환된다. 무너진 사랑탑 노래가 들리면 아버지 또한 반드시 내 기억에 소환된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는 자의 기억에 소환될지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나는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두에게 기억되고 싶은 강한 바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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