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순 수필가

임정순 수필가

[동양일보]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하다. 입안에서 천천히 휘몰아 칠 때 저절로 미소가 번지고 오감이 작동한다. 하지만 영혼을 흔들 만큼 기억에 남는 음식은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먹는 음식은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음식을 생각하면 그 당시의 상황과 추억이 떠 올라야한다. 일찍부터 혼밥을 즐기던 20대엔 속상한 일이 있거나 머리가 복잡하면 매운 짭뽕을 먹으면서 훌훌 털어 버리고 힘든 일이 별게 아니라며 새 힘을 얻었다. 또 언젠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저녁 식사로 나온 소고기배추된장국이 얼마나 맛있던지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 고맙다는 기도를 했다. 그 힘으로 큰 수술을 잘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런 기억이 있기에 객지에서 오랜만에 집에 오는 자식들을 위해 고사리와 소고기를 듬뿍 넣은 육개장을 끓인 다음 세상을 잘 이겨 내라는 처방약으로 후추를 넣었다.

미식가들은 거리를 불문한다. 일본 우동을 먹기 위해 밤 비행기로 가서 오로지 우동만 먹고 온다는 얘기도 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 우동을 먹기 위해 딴엔 밤을 새워가면서 일을 하고 시간을 쪼개서 그 음식으로 자신을 다독이면서 맛을 음미하며 느끼는 행복감 때문이니라.

평상시 음식에 관심이 많다 보니 TV에 나오는 음식프로를 예사로 보지 않고 적어 놨다가 활용해 본다. 적어 놓은 노트만 해도 몇 권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적어 놓을 필요가 없다.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 검색만 하면 맛있게 요리하는 비법이 넘쳐난다.

누군가 소울푸드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는 음식이 있다. 일본말로는 스시, 즉 초밥이다. 회전초밥 집은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우선은 마음이 급하고 머리가 복잡하다. 고민해서 선택한 맛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있고 옆에 쌓이는 접시 개수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계산이 되니 말이다.

초밥은 여러 가지 생선의 신선함과 똑 쏘는 겨자향의 어우러짐이 입맛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소울푸드라고 할 만한 계기는 “초밥은 나의 혼이 담긴 음식입니다”라는 “스시장인 지로의 꿈” 이라는 다큐멘타리 영화가 초밥에 관심을 갖게 했다. 흔히 먹을 수 있는 초밥은 얼마든지 있지만 영혼이 담긴 장인이 만든 초밥의 맛이 궁금하다는 얘기를 아들은 수첩에 적어 놨던 것이다.

엄마만 혼자 초대한다며 예쁘게 하고 오라는 부탁에 깜냥 껏 멋을 내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 아들도 핸섬하게 갖춰 입고 나왔다.

점심식사에 여섯 명만을 위한 메인 셰프는 정중히 인사를 한다. 보조 세프 한명에. 서빙 한명. 새우와 게살로 만든 부드러운 스프로 시작하여 단촛물에 버무린 밥을 현란한 손놀림으로 만든 후 참돔이라고 설명한 후 앞에 내놓는다. 밥알도 뜸이 푹 들어 250개가 서로 엉기지 않고 신선한 생선은 쫀득하니 맛있다.

초밥에서 밥이 얼마나 중요한지 밥만 짓는데도 “지로 장인”은 최하 3년 이상씩 수련을 거치는 과정을 봐서 안다. 숙성 회는 약간 비릿하지만 그대로의 맛이 있고 단새우 초밥은 달아서 한 첨 더 먹고 싶다. 농어는 부드러워서 입안에 가둬 두고 싶은데 저절로 넘어간다. 고등어는 특유의 향이라 먹어 본 맛이고 청어는 불 맛이 난다. 먹는 사람의 속도에 맞춰 짧은 시간이라도 밥이 식지 않게 신경 쓰는 모습에서 진정 대접받고 있다는 만족감에 예사로 듣지 않고 눈 호강을 시켜준 아들의 마음이 더해져 있다.

몇 번째 나온 초밥인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의 황홀감에 영혼을 흔들었다.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몸이 가볍게 떨려 눈을 감고 천천히 음미하니 오감이 춤을 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소울푸드를 만나는 날이었다.

아들과 조근조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던 셰프는

“전 한 번도 어머니를 모시지 못했어요. 부끄럽네요”

달달한 홍시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 하고 자리를 뜨는데 셰프는 보이지 않았다. 밖을 나와 보니 차 문을 열고 서 있는 셰프를 보고

“ 어머니도 모시면 자랑스러워 할 거에요”

오늘 만큼은 아들의 주머니 사정도 미안하지 않다. 오래도록 생각해온 에미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버킷리스트중 하나를 지우는 날이니 아들도 행복하리라.

아들의 또 다른 버킷이 궁금하지만 묻지 않으련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